물가인상율의 「두 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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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술병에 술이 반쯤 남았을 때 『아직도 반이나 남았구나』하는 사람은 낙관론자, 『이제 반밖에 안 남았구나』하는 사람은 비관론자란 말이 있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보기에 따라 정반대로 인식하고 표현도 다른 것이다. 물론 듣기에도 다른 것이다. 이런 현상은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통계의 마술이란 것이 요상한 것이어서 전혀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도 전혀 다르게 유도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작년물가(소비자)가 얼마나 올랐는가를 말할 때 『12.6%밖에 안 올랐다』고 할 수도 있고 『23.3%나 올랐다』고 할 수도 있다. 12.6%와 23.3%는 엄청난 격차지만 둘다 옳다.
그만큼 통계란 것은 쓰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여의봉 같이 될 수가 있다.
물가는 이왕이면 덜 올랐다고 하는 것이 말하기도 좋고, 듣기도 좋으니 작년에 12.6%만 오른 것으로 발표되고, 또 그렇게들 알고 있으나 그것은 낙관적으로만 본 것이다.
작년 12월 물가를 재작년 12월의 그것과 비교하면 12.6%밖에 오르지 않았다. 연말과 연말을 비교하는 것을 시점대비라 하는데 이것은 물가의 추세를 나타내는덴 알맞은 방법이다.
이 방법은 작년과 같이 연말에 물가가 떨어지는 경우엔 물가상승률이 너무 낮아지는 경향이 있다.
쌀값이 1년 내내 한가마 6만5천원(일반미 기준)하다가 12월만 6만2천원으로 떨어져도 그것이 작년 쌀값으로 잡히므로 물가가 덜 오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작년 쌀값은 8.7%밖에 오르지 않았다.
그려나 작년 1년 동안 가계에서 사먹은 쌀값은 한 가마 6만2천원이 아니라 6만5천원이다.
가계에서 실제 지출한 것을 기준으로 보면 연말시점대비의 물가는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작년에 물가가 12.6%밖에 안 올랐다는데 대해 실제 살림을 꾸린 주부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도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다.
가계부담을 실감 있게 나타내는 물가는 작년의 총 평균가격을 재작년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이다.
연말에 물건값이 내렸다하여 그 이익이 소급해서 돌아가지 않으며 이미 비싸게 사먹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쌀값 같은 것도 작년의 평균 가격이 한 가마 6만4천9백10원인데 재작년은 4만5천9백20원이므로 41.3%가 올랐다는 식이다. 이것을 연평균대비법이라 하는데 한국은행의 공식 통계에도 이것을 쓴다.
쌀값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연말시점대비로 하면 작년에 8.7%밖에 안 올랐고 연평균대비는 41.3%나 올랐다. 어느 한 쪽도 틀린 것은 아니다.
어느 방법을 쓰든 큰 차가 안 나야 정상이다.
그러나 작년은 연말에 쌀·과일 등 농산물 값이 많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토록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따라서 작년의 물가추세를 안정기조의 정착이라고 보기엔 아무래도 성급한 것이다. 특히 농산물 폭락이 물가안정엔 기여했지만 그 때문에 농촌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생각할 때 작년의 낮은 물가상승률을 자랑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작년 물가상승률 하나만 봐도 이렇게 내용이 복잡하다.
그런데도 거두절미하고 물가가 12.6%밖에 안 올랐다는 소리만 높으니 많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이왕 오른 물가, 많이 올랐다하여 걱정을 끼치느니 보다 적게 오른쪽을 보아 안심도 시키고 인플레 심리로 잠자는 심모원려가 낙관론 쪽에 액선트를 두게 했을지 모른다.
물가는 확실히 심리적인 요인이 많아 『오른다 오른다』하면 들먹거리는 법이다.
그러나 좋은 쪽만 강조하다보면 그것이 다인양 자기최면에 빠질 우려도 있다.
1차 오일쇼크 후 한국경제가 『제일이다 제일이다』하다가 자신과잉에 빠져 무모한 일들을 그토록 벌여 오늘날 이토록 고생하지 앓는가.
우리 나라에선 견해마저도 일사불란하게 물결치는 경향이 있는데 물가를 지나치게 안정됐다고 보는 것도 그런 흐름이 아닌지 모르겠다. 분명히 재작년보다 안정된 것은 사실이나 그 내용을 보거나 우리의 경쟁국들과 비교할 때 아직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단계다.
작년 물가가 12.6%밖에 안 올랐다고 한 쪽에서 희희낙낙하면 다른 한쪽에선 23.3%나 올랐는데 무슨 소리냐고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한마디쯤 나와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유비무환도 될 것이다. 최우석<부국장겸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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