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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서의 열정엔 장애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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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인천 장애인아시안게임 휠체어댄스 장혜정(왼쪽)과 이재우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열아홉 살 나이 차에도 둘은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인천=신인섭 기자]

형광색 드레스를 입고 휠체어를 탄 여성이 무대에 섰다. 그의 파트너는 검정 연미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 나이와 성별, 게다가 신체적인 상황마저 달랐지만 이들은 음악의 리듬에 몸을 맡겼다. 흐르는 선율에 혼연일체가 된 이들 앞에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었다.

 41개국 6000여명의 선수·임원이 참가해 18일부터 1주일 동안 치러지는 2014 인천 장애인아시안게임에는 특별한 종목이 하나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유일하게 함께 호흡을 맞추는 휠체어 댄스다. 장애인 스포츠 종목 중 텐덤사이클·보치아 등 비장애인이 경기 보조원 역할을 하는 종목은 있지만 장애·비장애인이 선수로서 동등한 역할을 하는 종목은 휠체어 댄스가 유일하다.

 이번 아시안게임에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휠체어 댄스는 콤비(장애·비장애인 동시 출전)와 듀오(장애인만 출전)로 나뉜다. 여기에서 장애 정도에 따라 클래스1·클래스2로, 댄스 종류에 따라 라틴·스탠더드로 세분화한다. 한국은 이번 대회 휠체어 댄스 6개 종목 중에 4개 종목, 11명의 선수가 참가한다. 이 가운데 가장 기대를 모으는 선수는 장혜정(38)-이재우(19) 커플이다. 나이 차가 19살이나 나지만 이미 세계 정상권에 오른 ‘환상의 커플’이다.

 장혜정은 네 살 때 척추 손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이다.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늘 힘들어하던 그에게 휠체어 댄스는 새로운 활력을 줬다. 장혜정은 “고등학생 때 특수학교에서 휠체어를 타고 힙합 춤을 추는 오빠들을 봤다. 그 모습이 멋져서 나도 언젠가는 춤을 추게 될 거라는 꿈을 가졌다”고 말했다. 그는 2001년 직장에서 처음 휠체어 댄스를 접했다. 2010년 4월부터는 아예 선수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장혜정은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지만 내 이름 석 자를 알릴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때 만난 파트너가 고교 1학년이었던 이재우였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댄스스포츠를 했던 이재우는 고교 1학년 때 전국체전 은메달을 따낸 유망주였다. 그에게 휠체어 댄스는 새로 개척하고 싶은 영역이었다. 이재우는 “휠체어 댄스 전국 대회를 처음 보고 개성 있는 종목이라고 생각했다. 호기심이 생기던 차에 선생님의 권유로 흔쾌히 휠체어 댄스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댄스스포츠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장혜정과 휠체어 댄스를 처음 접했던 이재우가 호흡을 맞추는 건 쉽지 않았다. 휠체어에 몸을 지탱하기 위해 끈으로 허리·다리·무릎·발목을 고정한 상태에서 춤을 추느라 장혜정의 몸은 언제나 퉁퉁 부어올랐다. 이재우도 스텝을 밟다 휠체어 바퀴에 발이 끼는 경우가 많았다. 경기 중 둘 다 넘어지는 아찔한 상황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장혜정은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연습하는 곳까지 1시간 이동했다. 저녁에 2~3시간씩 춤을 췄다. 힘든 점도 많았지만 춤에 미치다시피 했다”고 말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둘은 국내 최고의 휠체어 댄스 커플로 떠올랐다. 2011년 전국장애인체전에서 은메달을 따낸 둘은 지난해 체전에서 3관왕(스탠더드 5종목·퀵스텝·단체)에 올랐다. 두 사람은 지난달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가 주관하는 러시아 휠체어 댄스스포츠 대회에서 한국 휠체어 댄스 사상 최고인 2위에 올랐다. 장혜정은 “체격이 좋은 유럽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방석 높이를 높여 앉았다. 시선을 끌고 싶어서 그렇게 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왔다”며 웃었다.

 휠체어 댄스를 하는 순간만큼은 이들 사이에 벽이 없다. 화려한 동작에다 눈을 뗄 수 없는 표정 연기도 돋보였다. 이재우는 “이제 우리는 눈빛만 봐도 서로 통한다”고 했다. 장혜정은 그토록 가리고 싶어했던 등 부위의 수술 자국을 드러내놓고 연기를 펼친다. 그는 “중증 장애인들이 나를 보고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더 잘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둘은 서로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장혜정은 “나에게 춤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라고 했고, 이재우는 “장 선생님을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대구에서 장애인을 위한 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는 장혜정은 ‘이 선생님’의 고민 상담도 해준다. 올해 용인대에 입학한 이재우는 주말마다 대구로 내려가 ‘장 선생님’과 호흡을 맞춘다. 이들이 얼마나 허물 없고 가까운 사이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재우는 “아픔을 드러내는 게 싫을 수 있는데 선생님은 늘 밝게 나를 이끌어준다. 벽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둘은 20일 콤비 스탠더드 클래스1에 참가한다. 스탠더드는 다섯 가지(왈츠·탱고·비엔나왈츠·폭스트롯·퀵스텝) 춤을 소화하는 종목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연기를 통해 이들은 휠체어 댄스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다고 한다. 이재우는 “조건이 달라도 함께 어울리면 뭐든 해낼 수 있다. 우리의 연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걸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천=김지한 기자
사진·영상=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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