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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산에서 살다|밭 일구고 산삼캐기·뱀잡이로 생활|"4대째 살지만 떠날 생각없다"|자녀교육이 문제… "아이들이야 도시로 가야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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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개화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전통적 가족형태는 무너져 다양화·복잡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가족의 구성도 생계수단이나 상호간의 의존성, 그리고 의식수준에 따라 다양함을 더해가고 있다. 사회를 이루는 최소 집단인 가정은 이같은 변화 속에서도 고립과 소외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마지막 위안처가 되어야 한다. 때문에 사회학자 가운데 현대인은 가족관계를 보다 융통성 있고 광범위하게 확대시키면서 정을 나누고 사는 지혜를 지녀야 한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오늘을 살고 있는 많은 형태의 가족을 찾아 그들의 생활상·의식·인생관을 알아보고 개인주의 사회가 직면한 여러 가지 문제점을 서로 듣는 가족주의적 인간사회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도록 해보는 『한국의 인간가족』 시리즈를 엮는다.
아침같이, 질갈이, 령갈이 등 깎아 지른 계곡과 산비탈이 이루어 놓은 왕성골 (강원도 양양군 서면 갈천리)에는 아직도 산짐승을 쫓는 밀렵꾼들의 총소리를 가끔 들을 수 있다. 멧돼지의 밭작물 피해 때문에 일정기간 동안 멧돼지 사냥이 허용되기도 하는 이곳은 60년대까지만해도 유명한 창잡이나 강원도 명포수들의 이야기가 푸짐했다.
사냥군과 심메마니 속에서 자라온 여익환씨(45)의 집은 왕성골에서 4대를 살고 있는 가족. 이조말 동학군에 가담했던 엄씨의 할아버지가 관군을 피해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 화전을 일군 곳이 바로 이곳이다.
산이 깊어 예부터 세상을 등지는 사람이나 많은 사연으로 피신한 사람들이 터를 잡기도 했던 이부근 일대는 현대에 들어서도 도시를 등지고 찾아드는 사람이 더러 있으며 화전민이 살다 버린 너와집이 폐가가 된 채 가끔 눈에 뜨인다. 『심(산삼)으로 말하면 이 부근일대가 유명합니다. 설악산이나 오대산 일대에도 많긴 하지만 그곳은 워낙 돌산이어서 심이 많지가 많을 뿐더러 좋은 심으로 꼽히지 않아요.』
약초나 산삼캐기 등 할아버지대부터 심메마니로 유명했다는 엄씨는 자신도 14세에 처음으로 심 4뿌리를 집에서 멀지 않은 채마전에서 캐냈으며, 그 동안 몇십 포기의 산삼을 캔 심메마니이기도 하다.
엄씨의 가족은 7자녀와 부인 이금자씨(37). 그리고 어머니 김춘왕 할머니(68)까지 모두 10명. 산비탈에 일군 3천여평의 밭에 옥수수·씨감자·콩 등 밭작물 농사를 짓고 있지만 약초나 버섯캐기, 뱀이나 산짐승 잡기 등 자연채취 쪽이 훨씬 수입이 높은 편이다.

<"4남 3여 많지 않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이런 산속에서도 먹고사는데 큰 어려움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 집은 아이들이 워낙 많아 교육비 때문에 부담이 큽니다.』
엄씨는 28세때 부모님의 주선으로 속초에서 하룻길을 걸어 들어가야 하는 시골의 처녀 이씨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부모없이 불우하게 자란 이씨는 시집온 후 이 골짜기를 떠나 본 적이 거의 없다.
엄씨가 워낙 희성이기 때문에 자녀를 많이 낳아야 한다는 것은 며느리로서의 큰 임무에 속한 것이었다. 또 사람이 귀한 곳에서 자녀를 많이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장녀 명순 (19) 장남 민영 (17)을 비롯, 차현 (16) 주현 (13) 영순 (11) 정순 (10) 정현(6) 등 4남 3녀를 낳는 동안 이 산골에도 가족계획 계몽반이 들어와 이씨는 막내 정현을 낳은 후 산아제한을 시작했다.
『교육비만 들지 않는다면 아이는 많을수록 좋지요. 10세만 넘으면 재먹을 것은 벌어들일 수 있답니다.』
네째 아이부터 부인의 산고를 직접 풀어 주었다는 엄씨는 7명의 자녀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단다.
엄씨의 말대로 지난 여름 장남 민영군이 뱀을 잡아 40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그밖에 약초캐기·짐나르기·개구리잡기로 민영군이 올린 수익이 아버지가 벌어들인 수익에 버금갈 정도였다.
『큰 구렁이 한마리 잡으면 10만원까지는 받을 수 있어요. 겨울에 개울을 뒤져 개구리를 잡아도 한마리에 3백∼4백원을 받아요.』
근년에 들어 뱀이나 개구리를 즐겨 찾는 도시인들이 늘어 뱀과 개구리는 없어서 못 팔정도라고 민영군은 설명해 준다. 덫으로 멧돼지룰 잡으면 수익이 훨씬 높지만 위험한 일이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10여년전 엄씨가 곰을 찾는 밀렵꾼의 길 안내를 해주었다가 당국에 걸려 혼이 나고 재산도 적지 않게 탕진했기 때문에 금지된 사냥은 하지 않는다.

<개구리 구이로 안주>
민영군이 벌어들인 돈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주어진다. 중학을 겨우 마친 민영군은 아버지를 도와 동생들의 공부롤 꼭 시켜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심을 찾아다니느라 서당공부도 제대로 못한 엄씨와 돈이 없어 학업을 계속 못한 장남이 뜻을 모아 집안의 교육열을 올리고 있는 셈이다.
그 덕분에 2남·3남은 양양에 나가 할머니와 함께 자취하며 중학에 다니고 있고 2녀·3녀는 갈천 국교에 다니고 있다. 장녀 명순양은 양양의 양장점에서 일하고 있는데 적은 봉급으로나마 집에 들를 때면 꼭 부모나 동생의 옷가지를 사들고 온다.
사람이 귀한 곳이라 가족들끼리의 인정은 살뜰한 데가 많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산삼을 상비약으로 두고 있어 2남 차현이 괴질로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산삼으로 살려냈으며 시어머니가 며느리 해산때마다 산삼 한 뿌리씩을 먹였을 정도였다.
가까운 동해의 겨울 일출이 아침 7시여도 이곳 산간마을에 해가 오르는 시간은 8시 10분. 그러나 농사철이 아니어도 일이 많아 부인 이씨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쇠죽을 쑤고 아침밥을 것는다. 1시간 반을 걸어서 산판 일을 하러 가야하는 엄씨는 늦어도 7시에 집을 떠나야 한다. 농한기 부업으로 시각한 산판 일은 하루평균 6천∼7천원의 벌이가 된다.
엄씨가 산판에 가고 나면 부인 이씨의 손은 더욱 바빠진다.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고,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고, 부엌에서 기식하는 소의 여물을 만들고, 비누도 흔치않아 잿물에 빨래를 한다.
엄씨가 귀가하는 시간은 저녁 7시.
주막거리도 없는 산골마을이어서 엄씨가 곧장 일터에서 귀가하면 토담집 속에서는 이때부터 오순도순 가족적인 대화가 오간다.
감자를 듬성듬성 섞어 지은 밥에 김치와 콩비지 찌개. 호사스런 음식이라면 두부와 도토리묵 정도가 오른다. 엄씨가 아랫마을 부녀 상조회에서 사온 껌 통은 아이들에게 큰 즐거움이다.
피곤한 몸으로 귀가한 엄씨는 가끔 아들이 잡아다 준 개구리 구이로 소주 한잔을 즐기며 흐뭇한 시간을 보낸다.
양철통을 반으로 잘라 만든 화로에 불을 피우고 둘러앉으면 단란하고 오붓한 일가족. 대화의 단절이나 소외감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

<1년 수입 3백만원>
엄씨집의 연평균 수입은 3백만원 정도. 지난해 2천5백평의 밭에 씨감자를 심어 84만원, 2백50평의 밭에 배추를 키워 50만원의 수입을 올렸으며 옥수수로도 10만원의 수입을 얻었다.
이밖에 약초채집·뱀잡이·개구리잡이·토종꿀 등 기타수입을 합해 3백만원으로 잡는다. 월평균 25만원의 수입. 그러나 감자를 팔아 쌀을 사야하는 어려움이 있고 교육비가 연40만원이 들어 빠듯한 가계를 꾸려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성냥 한개비라도 아끼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위로해요.』
엄씨는 건강한 자녀들이 무척 자랑스럽다. 할아버지대부터 『내것 아니면 갖지 말라』는 가훈이 있어 아이들에게도 늘 이점을 강조한다는 엄씨다.
음력 4월 초파일과 9월 9일 꼭 산기슭 서낭당에서 제를 지내는 엄씨 일가는 자신들을 불교신자로 알고 있다.
『아이들이야 도시로 나가야겠지요.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나이 들면 다시 집을 찾아 나서려고 합니다. 지금도 두세달 헤매면 한뿌리 정도 찾을 자신은 있으니까요.』
산골에서 나서 산골에서 죽고 싶다는 소망은 부인 이씨도 마찬가지다. 몇년전 엄씨가 도시로 나갈 뜻을 비쳤을 때 이씨는 『이곳이 좋지 않느냐』며 그를 눌러앉게 했다. 다행히 산 아래까지 길이 뚫려 교통이 편해졌으며 맏아들 민영이가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을 밝혀 엄씨 부부는 믿음직스러워 한다.
지난해 난생 처음 부부가 서울 나들이를 해 이씨는 이 산골에서 유일하게 서울 구경한 주부가 되어 자랑스럽다.
배우가 되고 싶고 간호원·교사가 되고·싶은 자녀들을 힘닿는 데까지 밀어줄 수 있다면 산골에서의 일생에 한이 없다는 부부다. <김징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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