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8)제76화 화맥인맥(27)|월전 장우성|구룡산인 김용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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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영운 김용진 선생을 알기는 내가 선전에 한두 번 입선한 병아리 화가시절이니까 l930년대 중기였던가 싶다.
영운장은 고종 때 영상을 지낸 영어 김병국 공의 손자이기도 하지만 장안의 멋쟁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항상 연옥 색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삐뚜름하게 쓰고 다녔다.
영운장은 미국대사관 테니스클럽의 회원이었다.
내가 가친회갑기념화첩에 그림을 받으러 영운장 댁에 갔을 때 그 어른은 지금 서울 익선동에 있는 요리 집 오진암 자리에 살고 계셨다.
영운장은 바깥 사랑채에 계셨는데 뜰에서부터 돌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
방안에는 문방제구를 갖춰 놓고 고서화·고서적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한눈에 봐도 전형적인 사대부 집임을 느끼게 했다.
놋쇠로 만든 재떨이 담배 함인 재판 위에 장축이 놓여 있었지만 영운장은 늘 궐련을 피워 물었다.
그야말로 현대적인 멋이 줄줄 흐르는 분이었다.
노소장유도 별로 내세우지 않고 특히 젊은이들을 좋아했다.
내가 화첩을 받으러 갔을 때도『참 오랜만이오. 어서 앉으시오』하고 존 어를 썼다. 영운장은 젊어서 화성(수원)군수를 지냈다. 그분은 일제시대 중국의 유명한 서화가 방명에게 그림 공부를 했다.
방명이 식산 은행 두 취로 있던 유하광풍이란 일본사람 집에 오래 머무르면서 영운장을 가르쳤다.
영운장은 특히 중국의 명가 오창석의 그림에 심취해 있었는데 그 어른이 공부하던「오창석 화훼 12정」을 나에게 준 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분은 그 책 첫 장에「월전 인형 혜존」이라 쓰고「갑오춘 구룡산인근증」이라 적은 후에 낙관까지 해서 내게 주었다.
어느 해인가 미국대사관에서 동양화가를 초청한 일이 있었다.
소정(변관식)·제당(배렴)등 동양화가 10여명이 모여 한식 구조로 된 방에서 저녁을 들었다.
반추를 곁들인 만찬인데 제법 취기가 올라 흥이 도도해졌다. 처음에는 모두「말죽은 뒤 체 장수」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는데 술잔이 몇 순배 돌면서 서먹한 분위기가 풀어졌다. 이때 영운장은 토막영어이긴 해도 미국대사와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으며「허허」웃곤 했다.
나는 영운장이 미국사람과 자연스럽게 말하는 걸보고 저 분이 언제 영어를 배웠나 하고 깜짝 놀랐다.
영운장은 어려서 집안에 독선생으로 들어온 시·서·화에 능했던 백련(지운영)에게 한학을 익힌 걸로 알고 있는데 영어를 구사하는 걸보고 과연 멋쟁이구나 생각되었다.
영운장이 서울대 미술대학에 출강할 때는 나와도 더러 어울렸다. 그분과 나이 차는 많지만 사람을 가리지 않아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중국에서 갑골문자연구로 이름이 높은 사학자 동작빈과 청말 귀족으로 그림을 잘 그렸던 화가 부 유가 서울대에 왔을 때 미술대학 장 실로 그 사람들을 초청, 석상 휘호를 하는데 영운장이 참석해 자리를 빛내 주었다.
영운장은 국전초기에 서예부(사군자 포함) 심사위원을 5번(1∼5회)이나 역임했다.
한번은 문교부에서 심사위원들을 저녁초대, 춘곡(고희동)·영운(김용진)·의재(허백련)·소전(손재형)·제당, 그리고 내가 동석해서 한바탕 놀았다.
영운장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 중 최 고령자였는데 거드름을 피우지 않고 술 따르는 아가씨 옆에 앉아 덕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영운장은 말년에 운니동의 납작한 한옥에서 작은댁과 함께 살았다.
병환 중에도 그림을 부탁하면 괴로움을 무릅쓰고 그림을 해주던 분이다.
누가 채색이라도 조금 사다 드리면 그렇게 좋아하고 답례로 꼭 소품이라도 한 점씩 그려 주었다.
영운장은 돈의 댓 가로 그림을 그려 주던 사람이 아니다. 자기 그림을 좋아한다면 그냥 해주던 그림인심이 아주 후한 분이다.
그래 지금 웬만한 집엔 영운장 그림 한 점 없는 집이 없을 정도지만 그림이 너무 흔해서 값이 나가지 않는 게 유감스러울 뿐이다.
68년 영운장이 망 구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작은 마나님이 그분이 쓰던 낙관도장을 관에 함께 넣어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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