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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백년」의 주역들(9)최초의 하와이 이민|머슴·학생·망명객에 스님까지 끼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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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03년 1월13일 미국상선 겔릭 호는 하와이 오하우 섬 호놀룰루 항에 닻을 내렸다. 이 배에는 인솔자인 2명의 통역을 비록, 남자54명, 여자 21명, 어린이 25명 등 모두 1백2명의 한국인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하와이군도로 일신이나 권속을 데리고 주접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자에겐 누구든지 편리하게 주선한다』는 당시 이민업무를 맡은 원 민원의 벽보를 보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선 한국 최초의 이민들. 그러니까 하와이 한인이민 80년 역사의 막을 연 프런티어 들이다. 그후 2년 반 동안, 1905년 7월 하와이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65척의 이민선이 실어 나른 한국인은 모두 7천2백26명(남자 6천48, 여자 6백37, 그리고 어린이 5백41명)에 달했다.
1830년대에 들면서 하와이는 큰 전기를 맞았다. 하와이의 자연환경에 알맞은 사탕수수재배가 시작, 미국자본이 다량으로 유입되었고 곳곳에 대규모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들어섰다.
사탕수수(후엔 파인애플까지)는 원래 대규모의 플랜테이션 식 재배가 아니고는 유지할 수 없는 것. 자연히 대량의 노동력이 필요했고, 사탕업자들은 그 해결책을 동양에서 찾았다.

<정부서도 적극 권장>
첫 번째 대상이 중국인 쿨리(고력)들이었다. 1852년부터 82년까지 30년 동안 모두 5천37명의 쿨리가 하와이에 들어왔고, 그 결과 하와이 전체노동력의 49%를 차지하게까지 이르렀다.
1870년대에 들면서 사탕수수밭 노동자들의 중국인 일색에 대한 반대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노동력이 단일종족으로 구성될 경우 경영자에 대한 반란과 노동조건에 대한 불평을 제기하는 여건이 된다는 의견이었다.
이번에는 일본인의 차례. 1886년부터 시작된 일인노동자들의 하와이 진출은 단기간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 1900년 무렵에는 3만1천명을 기록, 전체노동자의 73%를 차지하게 됐다.
다시 일인이 문제였다. 그래서 착상한 것이 한국인과 필리핀 인을 데려오는 것이었다. 1902년 12월 주한미국공사「앨런」은 하와이 지사「돌」(파인애플로 유명한) 에게 보낸 공 한에서『한국인들은 오랜 세월 복종하는 습성으로 살아와 인내심이 많고 유순해 일을 잘하며,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길들이기가 훨씬 쉬운 민족』이라고 소개했다.
이에 앞서 하와이 사탕재배협회장「갈즈·비숍」은 한국을 방문, 미국공사관을 통해 한국정부와 이민협정을 맺고, 이어서 이민알선목적의 동서개발회사를 설립, 그 지배인으로 당시 제물포에서 무역업을 하던 미국인「데이비드·데실러」를 임명했다.
한국정부에서도 하와이 이민을 호의적으로 받아 들였다. 수년 째 계속되는 기근으로 국민들은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민 개시 바로 전해인 1901년만 해도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정부는 방곡령을 내려 양곡의 반출을 막고, 안남미 30만 섬을 수입해 와야 할 정도의 악조건에 있었다. 이런 지경에 한사람이라도 해외에 내보내는 일은「좋은 일」이었다.
l902년 11윌16일 정부는 궁내부에 이민전담기구인 유 민원을 설치, 총재에 민영환, 부총재에 민상호를 임명하고, 적극적인 이민장려에 나섰다.
그러나 유교적 생활습관에 젖은 한국인들로선「저 친척 기분 묘」하고 낯선 이국 땅으로 떠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 이민모집실적은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동서개발 측은 하와이는 1년 내 상쾌한 기후로 살기 좋다, 선임과 지참금으로 1백70원의 돈을 전대해 준다는 조건으로 하와이 이민모집에 열을 올렸다.
이민 출발과 함께 겪은 선 중 생활은 폐쇄사회에서 개방사회로 가는 첫 경험이었다. 이민선은 여객선이 아닌 상선이었으므로 선실에 남녀구별이 있을 리 없었다. 남녀유별의 엄격한 윤리구조에서 살아온 그들은 처음엔 크게 당황했으나 차차 적응해 갔고 새로운 땅 하와이에서 새로운 남녀관계를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첫 이민 1백2명이 처음 배치된 곳은 오하우도 목골리아 사탕수수 농장. 그리나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풍요와 안 락이 아니라 피땀을 요구하는 중노동과 채찍이었다.
동서개발회사의 한국인 직원으로 l903년 제2차 이민선 콥틱 호로 63명의 이민을 하와이까지 호송한 현 순은 그의 저서『포타 유람 기』(1908년) 에서 당시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한인노동자의 생활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매일 4시 반 제조장에서 취 적(사이렌) 하면 노동자들은 기상하여 세면 후에 즉시 식사…5시15분에 일제히 노동 취 합 소로 출 회…오후4시30분에 필 역, 귀가하는데 노역 중에는 사화(잡담) 와 흡연을 엄금하더라…노동자들의 일 삭 임금은 만 26일을 노동한 자래야 18달러를 득 하는데 그중에서 식비 6달러와 연초·의복·제반잡비·도합 10달러를 제하고 8달러를 저축하나 음주·잡기·색 장에 심 혹한 자는 고 토에 귀할 때가 묘연하고….』

<10시간의 중노동>
사탕수수밭에서 매일 10시간의 일은 중노동이었다. 당시 한인노동자는 그 구성에 있어, 대부분이 농민출신이었던 중국·일본의 경우와는 달리, 정작 농민출신은 전체의 14%에 불과했고, 그 외는 도시의 일상노동자·군인·하급관리·광부·머슴·학생·망명객, 심지어는 불참까지 끼어 실로 잡다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고용계약에 의한 자유노동자였으나 실제로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다. 출발당시 선임과 지참금으로 받은 것과 도착 시 상륙 비를 합한 1백50달러의 전대 금이 그들을 사탕수수밭에 붙잡아 두고 있었다.
한달 급료에서 아무리 절약해도 저축할 수 있는 돈이란 겨우 8달러정도. 그러니까 최소 2년간은 배치된 농장을 떠나지 못하고 노예에 가까운 대우를 감수해야만 했다.
「태평양의 천국」하와이에 대한 한인노동자의 실망은 귀국과 본토 이주로 나타났는데, 하와이 이민국 집계에 따르면 1905년부터 16년까지 하와이에서 동양으로 떠난 한국인 귀국자는 모두 1천2백46명이나 됐다.
본토 이주도 1905년부터 시작됐다. 때마침 캘리포니아 지방에서 미작 붐이 일어 동양인 노동자를 대량 필요로 하자, 사탕수수농장을 탈출하는 한인노동자가 늘어 1907년까지 3년 동안 1천여 명 이상이 본토로 들어갔다. 한인 노동자중에는 기대와는 거리가 먼 하와이 생활에서 오는 시름을 술·도박·여자로 달래는 사람도 많아 한달 치 급료를 도박판에서 날리는 사람, 폭음을 일삼는 사람, 심지어는 아편을 피우는 사람까지 생겨났다.
한인노동자들이 이처럼 정서적으로 불안한 생활을 한 것은 이들 대부분이 노총각 신분이라는데도 그 이유가 있었다. 당시 하와이의 한인 남녀비율은 10대1정도로 남자가 압도적으로 우세. 그나마 여자의 대부분은 기혼녀여서 독신 남자들의 결혼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농장주들과 정부 당국은 급기야 독신노동자들에게 안정된 가정생활을 마련해 주기 위한 방안을 마련했는데, 이것이 바로 유영한 사진결혼이었다.
사진결혼은 오래 전부터 중국인·일본인노동자 사이에서 있어 온 것으로, 우선 남자의 사진을 고국에 보내 여자의 마음에 들면, 여자는 자신의 사진을 보내고, 이번에는 남자 쪽에서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여비 조로 2백 달러를 보내는 것이었다.
사진결혼의 첫 번째는 1910년 12월2일 호놀룰루에 도착한 최사라 양(23)을 신부로 맞은 38세의 노총각 이래수. 코너지방에서 청부농업을 하고 있던 그는 하와이 이민국 사무실에서 식을 올렸다.
사진으로만 혼담을 진행하다 보니 어처구니없는 일도 많았다.
『신랑들은 대부분 이민 올 당시의 사진을 보내고 또 자신의 무식을 감추려고 편지를 대필시켰는데, 본국에서 이것만 믿고 찾아온 신부들은 신랑감이 노인임을 알고는 실망,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는 터라 맘에 없는 결혼을 한 후 밤마다 눈물로 지새우고, 심지어는 목숨을 끊은 여자도 있었다.』(호놀룰루 주드 가 거주 이민2세「로즈」 최 여사의 회고)
정착 기에 들어간 하와이 한인들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착실히 개선해 갔다. 사탕수수농장에서 벗어나 도시적 생업을 갖는 한인들이 크게 늘어 1920년 초부터는 호놀룰루 시에서 최저 1천 달러에서 최고 2만 달러까지의 자본으로 상점을 경영하는 한인이 20명 선을 넘었다.
1902년 12윌 최초의 하와이 이민선이 제물포를 떠난 뒤부터 올해로 80년. 이제 이민 4세까지 배출한 하와이 한인들은 초기이민이 피땀으로 남긴 값진 교훈을 바탕으로 미주이민의 선배로서 자랑스런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혼돈한 나라 앞길 희망과 함께/독립의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정든 고향 떠나서 찾아온 곳이/태평양의 꽃 바다 하와이라오/이름도 좋을 씨고 하와이라오』(『하와이 동포의 노래』의 1절). <글=정우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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