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야의 최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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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세계사의 의혹중에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스탈린」 시대의 비밀경찰두목「라브렌티·베리야」의 최후.
그는 『죽었다』는 사실만 분명할 뿐, 그 이상은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수수께끼 속에 묻혀 있었다.
이제까지 알려진 제설들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제1설. 소 정부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1953년 6월 체포, 동년 12월 재판에 의해 당과 국가에 충성스러운 간부들을 말살하고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로 사형선고, 동23일 총살집행됨.
제2설. 「스탈린」의 딸 「스메틀라나」가 미국망명후 발표한 저서에 따르면 동년6월 체포직후 정식재판없이「흐루시초프」에 의해 극적으로 총살됨.
제3설. 모스크바대학 교수를 역임한「알렉세이·야쿠셰프」가 1969년 서방에 망명, 서독슈피겔지에 발표한 「베리야」최후재판 방청기. 53년12월14일에 시작된 재판에서「베리야」는 권력남용, 그루지아(그의 고향)멘셰비키지지, 동독을 서독에 넘겨 주려는 음모, 수많은 여성편력 등의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처형됨.
「베리야」는 「스탈린」 시대 「피의 숙청」을 연출,「국가의 적」「인민의 적」 「계급의 적」 「모반자」라는 누명을 씌워, 무려 2천만명을 처형한 장본인이었다.
「스탈린」치하에서 그의 공식직명은 내무인민위원(38년), 국가방위위원(41년), 정치국원및 내상(46년) 이었다.
그는 이런 지위를 통해 소련지도부전원의 사생활을 비밀사진·녹음·미행등의 수법으로 추적, 뒷덜미를 쥐고 있었다.
「스탈린」이 죽자 그에 대한 보복의 드라머는 비로소 정을 울렸다.
앞서「야쿠셰프」 교수의 수기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체포장면은 여간 드러매틱 하지 않다.
우선 군을 장악했던「주코프」원수가 탱크사단을 모스크바에 투입, 한편에선 정예병사 8명을 정치국회의실 커튼 뒤에 숨겨 놓은 상황에서 중앙위간부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크렘린궁의 경비도 만만치는 않았다. 비밀경찰 2개연대가 「베리야」의 신변과 크렘린궁을 지키고 있었다. 「베리야」는 언제나 그것을 믿었다.
결단의 순간. 회의장에 들어서는「배리야」를 누가 체포할 것인가.「흐루시초프」수상도 사양했다는 얘기는 희극같다. 결국 「주코프」가 좌중에서 벌떡 일어나 커튼뒤의 병사들이 그를 덮쳤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이것도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앙일보에 독점특약으로 연재되는 고「사다트」이집트대통령의 회고록은 또 다른 후문을 소개하고 있다.
「사다트」가 1960년 모스크바를 방문,「흐루시초프」수상으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라고 한다.
「베리야」가 바로 그 중앙위간부회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참석자 전원이 「베리야」의 자리로 돌진해 가, 그의 목을 졸랐다. 그 자리에서 교살(교살)해버린 것이다.
살벌하고 음산한 크렙린 정치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다. 공산독재의 시말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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