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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과 '친일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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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6월 2일부터 4일까지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한.일 국교 정상화 40주년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한.일 관계와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비전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열린 회의에는 연인원 1000여 명이 참석했다. 회의실마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대는 대성황이었다. 필자도 회의 마지막날인 4일 오후 열린 '한.일 언론인 라운드 테이블'에 참여했다. 대개 한.일 양국의 전.현직 도쿄(東京).서울 특파원이 모여 속내를 털어놓는 자리였다.

회의 막바지에 도쿄 근무 경험이 있는 한 한국인 논설위원이 농반진반으로 말을 꺼냈다. "도쿄 특파원으로 일하다 귀국한 한국 기자는 신문사 내에서 '친일파'로 불린다. '어이, 친일파. 점심 먹으러 가지'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반면 서울 특파원을 하다가 일본 본사에 귀임한 일본 기자에게는 '조선족'이라는 호칭이 붙는다고 들었다." 양국 기자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한국에서 '친일파'라는 말은 좋은 뉘앙스를 지니지 못한다. 일제하의 친일파, 즉 매국노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엊그제만 해도 국회 상임위원장이자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의 회장인 여당 국회의원이 자신을 친일파의 후손으로 몰아붙이는 야당 의원들에게 정색을 하고 대들며 반박했다. 일제 헌병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당 당의장이 찍소리 못하고 사퇴한 게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지난해 8월의 일이다.

비록 기자 사회에서의 농 섞인 호칭이긴 하지만 "어이, 친일파"에는 일반인보다 일본을 더 잘 안다는 의미와 함께 보통의 한국인 정서와는 동떨어지게 일본에 대해 호감.친밀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시각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럼 '조선족'은 어떤가. 몇몇 서울 주재 일본 특파원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대답이 대체로 비슷했다. 기본적으로 '조선반도(한반도) 문제 전문가'라는 뜻이지만, 약간의 비꼬는 분위기가 가미된 유머일 수도 있다는 해석이었다. 외교통상부에 근무하는 직업 외교관들이 오래 근무한 전공 지역에 따라 '차이나 스쿨'이나 '재팬 스쿨' 소속이라고 불리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조선족' 호칭에는 남북한 전체에 대한 일본 사회의 이미지가 알게 모르게 투영돼 있는 듯하다.

실제로 4일의 언론인 라운드 테이블에서는 일본 기자들의 '조선족다운' 발언, 그리고 한국 기자들의 '친일파 같은' 발언이 속출했다. 한 일본 기자는 "요즘 한국 신문의 인터넷 사이트에 일본 네티즌들이 적개심에 찬 댓글을 올리는 경우가 너무 많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독도에 관해 한국 측이 잘못 알고 있는 점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친일파'라는 욕설을 들었다"는 한국 기자도 있었다.

우리 몸에서 잇대어 있는 단단한 뼈와 뼈 사이에는 물렁뼈(연골)와 관절활액이 있다. 관절이 제대로 움직이려면 두 뼈 끝 부분을 감싼 물렁뼈가 충격을 흡수하고, 물렁뼈 사이의 관절활액이 마찰로부터 뼈를 보호해 주어야 한다. 관절이 잘 움직여야 뼈는 물론 주변의 인대나 근육도 무사하다. 물렁뼈가 닳으면 뼈 끝이 울퉁불퉁해지고, 점점 아프게 된다(퇴행성 관절염).

지금의 한.일 관계도 관절염에 비유할 수 있다. 곳곳에서 삐걱거린다. 정치인은 어쩔 수 없다 치고, 기자나 학자라면 물렁뼈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상대 입장까지 배려해 가며 말하고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쪽에서든 "넌 뼈도 아니야"라고 비판받기 십상이다. 그러나 바로 그게 물렁뼈의 역할이다. 하긴, 한.일 관계를 인체에 비유한 이 글을 보고 혹시 "내선일체 하자는 거냐"며 발끈하는 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

노재현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