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칼럼] 경마, 지하로 숨어서는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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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김한호
서울대 교수·농경제학

5000년 전 이집트 유물 중에 주사위가 있다. 3000년 전의 인도 경전 리그베다는 주사위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어느 가장의 한탄, ‘도박꾼의 애가’(哀歌)를 담고 있다.

 사행심은 예로부터 흐르는 인간 본능인 것 같다. 사행본능은 많은 오락·여가 놀이와 결합하여 다양한 사행상품을 만들었다. 복권, 카지노 뿐 아니라 스포츠와도 결합했다. 물론 우려와 통제가 따랐다. 그런데 경험상 통제는 새로운 사행상품을 낳거나 지하시장을 확대함으로 전체 사행시장을 줄이지는 못했다.

 만약 사행상품을 없앨 수 없다면 지하로는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최소한의 관리도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대표적 오락·여가·사행 상품인 경마가 우려된다. 지하시장이 공식시장 규모를 추월했다. 최근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추계에 의하면 지하 경마규모가 2005년 3조4000억원에서 2011년 11조원으로 급증하며 지난해 공식경마 규모(7조7000억원)을 크게 넘어섰다.

 컴퓨터와 다른 사행상품 확산으로 경마가 위축되는 건 세계적 추세다. 큰 동물인 말을 이용하는 경마는 대규모 장치와 많은 전후방 연관산업이 필요하다. 핵심적인 것만 들어도 말 생산·육성, 수의·보건, 장비, 경기장 건설 및 운영 등이 있다. 그래서 경마는 많은 시간과 공간, 인력, 비용을 요구한다. 반면 컴퓨터·인터넷 기반 사행상은 생산 및 운영비용이 작고 접근성도 뛰어나다. 이는 지하경마 확산과 직결된다. 고비용 경마상품을 저비용 컴퓨터·인터넷 설비를 이용해 지하에서 무단으로 판매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규제와 세금이 미치지 않는 지하시장은 걸 수 있는 금액과 환급금을 공식시장보다 훨씬 높게 설정하고 고객을 유인한다. 결국 지하에는 오락·레저가 없고 도박만 횡행한다. 하지만 지하시장에 대한 직접 규제에 한계가 있어 많은 경마 선진국이 공식시장 활성화를 통한 지하시장 흡수 전략을 편다. 장외발매소 설치와 온라인 판매 도입으로 접근성을 높이려는 것이다.

 한국도 장외발매를 도입했다. 하지만 장외발매소 입지를 둘러싼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경마의 순기능보다 사행성이 더 부각되어 부정적 인식이 커진 때문이다. 지하 경마의 확산은 이런 인식을 더욱 부추겼다.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공식경마의 오락·레저라는 순기능에 대한 인식제고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역에 설치되는 장외발매소가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 얼마든지 주민 친화적 고급 문화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야 한다. 결국 정부, 경마시행처의 적극적 노력과 주민의 이해가 필요하다.

 정부도 장외발매 수익의 일부는 과감하게 지역에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경마수입에 대한 세율과 배분규정을 바꿀 각오까지 해야 한다. 마사회도 과거 운영 방식을 철저히 반성하고 경영 혁신을 통해 주민들의 불신과 우려를 끊어야 한다. 모두의 노력으로 손자 생일 파티를 경마장에서 베풀어 주는 할아버지 모습을 한국에서도 보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

김한호 서울대 교수·농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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