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헌법 사실상 무산… 네덜란드서도 부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1면

▶ 유럽연합(EU)의 호세 마뉴엘 두라오 바로소 집행위원장이 1일 브뤼셀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유럽 각국 국민에게 EU 헌법안에 찬성해 주길 호소하며 눈물을 닦고 있다. [브뤼셀 AP=연합]

유럽 합중국의 꿈을 담은 유럽헌법이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았다. 지난달 29일 프랑스 국민투표 부결로 벼랑 끝에 몰렸던 헌법안이 1일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또 다시 부결됐다. 반대 61.6%, 찬성 38.4%였다. 헌법안 찬성을 호소해 왔던 얀 페테르 발케넨데 네덜란드 총리는 "매우 실망스럽지만 결과를 존중한다"고 말했다.

유럽 회원국 정상들은 16일 정상회담에서 대책을 논의할 예정이다. 정상들은 일단 헌법 승인 마감 시한(2006년 10월 말)을 늦추는 데 합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 유럽 통합 차질=프랑스에 이어 네덜란드마저 유럽헌법을 거부함에 따라 '하나의 유럽'을 향한 통합 작업은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이들 국가는 독일.이탈리아 등과 함께 지난 50여 년 동안 사실상 유럽 통합의 기수 역할을 해 왔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는 "이번 위기가 절대로 유럽 전체의 위기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이미 통합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유럽헌법은 유럽이 경제적 통합을 넘어 정치적 통합까지 나아가려 했던 시도의 상징이다. 공동 헌법의 좌절은 오늘날 유럽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유럽은 20세기 들어 두 차례나 세계대전을 치렀다. 어떻게 하든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강력한 바람이 '하나의 유럽'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중.동유럽 등 10개국에 EU의 문호를 개방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급속한 EU 확대는 기존 서유럽 핵심 회원국 내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EU가 25개국으로 확대된 지 한 달 만에 치러졌던 지난해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이미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선거에서는 유럽 통합 회의론자들이 크게 부상했다.

유럽헌법 비준 투표 과정에도 EU 회원국 간의 알력, 찬반 세력 간의 갈등만 두드러졌다. 헌법 승인을 위해 애써 온 EU 지도자들은 투표 결과에 실망하면서도 한결같이 "예정된 국민투표는 계속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반대 여론이 거센 나라들은 일찌감치 '투표 철회'의 명분을 찾고 있다.

◆ 명분보다 실리=네덜란드와 프랑스의 국민투표 부결에서 보듯이 통합이란 거대한 명분보다 눈앞의 자국 이익이라는 실리가 우선되고 있다. EU 본부가 있는 브뤼셀의 입김이 워낙 강력해 자국의 정치가들이 국민의 이익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컸다.

네덜란드 국민은 가장 유럽 합중국적인 사고를 하는 것으로 칭송받아 왔다. 하지만 생각을 바꾼 것으로 드러났다. 가장 큰 배경은 경제다. EU가 확대되면서 손해만 봤다는 것이다. 경제 성장의 발목이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못 사는 나라에 계속 돈을 줘야 했다는 피해의식이다. 반(反) 이슬람 정서, 터키의 EU 가입에 대한 경계심리도 크다. 유럽헌법과 터키는 무관하다. 그러나 헌법안을 승인할 경우 EU 지도부가 이를 신임투표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면 유럽 확대에 박차를 가해 터키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네덜란드 국민은 본 것이다.

런던.파리=오병상.박경덕 특파원

*** 앞으로 어떻게 되나

-헌법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모든 회원국이 비준해야 한다는데 벌써 두 나라가 반대했다. 비준 절차는 계속되나.

"두 나라가 반대했기 때문에 현 법안대로 채택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원칙적으로 비준 절차는 도중에 반대하는 나라가 나오더라도 끝까지 계속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16일 브뤼셀에서 열리는 EU 정상회의를 지켜봐야 한다. 여기에서 비준 일정을 강행할 것인지 아니면 유럽헌법이 정치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할지 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안이 있는가.

"사실상 없다. 그러나 헌법안에 따르면 2006년 10월 29일까지 20개국이 비준하고 다른 나라에서 비준이 어려운 경우 이 문제는 회원국 정상들의 모임인 유럽이사회에 보고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유럽이사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정확하게 규정돼 있지 않다."

-유럽헌법안에 대한 재협상은 가능한가.

"헌법안의 일부 내용을 수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어느 부분을 어떻게 수정할지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몇 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헌법안의 골자 중 일부, 가령 의사결정방식 변경은 개별적 협약으로 채택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운 시일 내에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영국처럼 국민투표를 취소하고 싶어하는 나라도 있다던데.

"국민투표가 예정된 7개국 중 영국은 반대 여론이 높아 부결될 가능성이 높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투표 취소를 내심 바라고 있다. 굳이 영국이 국민투표를 해서 EU헌법안 부결에 대한 책임을 나눠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다른 나라의 비난을 우려해 공개적으로 취소를 선언하지 못할 뿐이다. 아일랜드는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폴란드는 고민 중이다."

-앞으로 부결될 가능성이 큰 나라는 어디인가.

"영국과 같이 유럽통합에 소극적인 덴마크와 지난해 새로 EU에 가입한 폴란드.체코 등이다."

-유럽헌법이 '사망 선고'를 받으면 EU는 해체되는가.

"그렇지는 않다. 지금까지 EU가 이뤄온 경제통합과 정치적 연대의 틀은 기존의 니스 조약 등에 따라 변함이 없다. 유럽헌법안이 부결됐다 하더라도 그간 EU 회원국 간에 체결된 각종 협약은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 맞설 강한 유럽을 만들겠다는 정치적 통합 구상은 일단 물거품이 됐다고 봐야 한다. 대외적으로 EU의 위상은 크게 떨어졌다. 회원국들의 분열상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