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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었다 온 몸으로 말했다 그리고 통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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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헝가리 호드웍스 무용단의 ‘새벽’. 제17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에 초청된 대표적인 ‘누드 무용’이다. 남녀 무용수 네 명이 공연 시간 내내 옷을 벗은 채 강렬한 춤사위를 선보인다. [사진 시댄스]

‘누드 무용’이 올 가을 공연계를 수놓고 있다. 19세 이상만 관람 가능한 전라 공연이 줄줄이 무대에 오른다. 오는 18일까지 열리는 ‘제17회 서울세계무용축제(시댄스·SIDance)’는 그런 흐름을 뚜렷이 보여준다. 해외 초청작 12편 중 중 다섯 편이 ‘19금(禁)’이다. 이종호 시댄스 예술감독은 “누드에 초점을 맞춘 건 아니었는데 깊이 있고 재미있는 작품을 모으다 보니 전라 공연이 많아졌다”고 밝혔다.

 ◆편견과 관습 탈피 상징=무용수의 벗은 몸은 작품의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한다. 옷을 벗는 행위는 편견과 관습의 틀을 벗어남을 상징한다. 12일 서울 상일동 강동아트센터에서 공연한 덴마크 댄스시어터의 ‘블랙 다이아몬드’에선 전라의 무용수가 파괴적인 미래세계에서 희망적 인류애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8일 신수동 서강대 메리홀 무대에 오른 덴마크 그란회이 무용단의 ‘남자들과 말러’에서는 남성 무용수들이 거칠고 직설적인 에너지를 벗은 몸으로 표출했다.

 ‘누드’는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서의 몸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효과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달 26∼28일 ‘제14회 서울국제공연예술제(스파프·SPAF)’ 초청작으로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무대에 오른 콜롬비아 엑스플로즈 무용단의 ‘십자가의 일기’는 남성 무용수의 벌거벗은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작품이었다. 밀폐된 유리상자 안에 들어간 무용수가 옷을 모두 벗은 뒤 몸부림치듯 춤을 췄다. 그 과정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실린더에 담아내는 게 공연의 마지막 장면. 몸의 동물적 특징을 강조한 결말이었다.

 12, 13일 서울 서강대 메리홀에서 공연하는 ‘나는 너를’도 몸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 누드 장면을 집어넣었다. 두 남성 무용수가 등장, 치고 받고 엉키고 설키고 깨물고 꼬집고 안아주면서 우정과 견제가 공존하는 남자들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표현한다. 이들은 공연 중반 이후부터 벌거벗은 채 마치 기계체조 동작 같은 춤사위를 펼쳤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으로 갖가지 기묘한 동작을 취하면서 서로의 성기를 잡아끄는 짓궂은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안무가인 아프리카 부룬디의 피터 암퍼는 누드 장면을 집어넣은 이유에 대해 “피부색과 땀, 상처와 흉터 등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 몸을 가리지 않고 다 보여줄 때 훨씬 효과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캐나다 비르지니 브뤼넬 무용단의 ‘젠더 콤플렉스’.

 ◆“잠시도 딴 생각 할 수 없었다”=‘누드’ 공연의 효용은 또 있다.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인다는 점이다. 10일 강동아트센터에서 캐나다 비르지니 브뤼넬 무용단의 ‘19금’ 공연인 ‘젠더 콤플렉스’를 관람한 회사원 김혜련(40·서울 광장동)씨는 “잠시도 딴 생각을 할 수 없었다”면서 “특히 반라 상태의 남녀 무용수가 성관계를 연상시키는 춤을 출 땐 남성·여성의 차이에 대한 여러 생각이 머리 속에서 회오리쳤다”고 말했다. ‘19금’은 티켓 판매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17, 18일 서강대 메리홀에서 공연 예정인 헝가리 호드웍스 무용단의 ‘새벽’은 12일 현재 티켓 판매율이 80%를 넘어섰다. 5만원짜리 R석은 이미 매진됐다. ‘새벽’은 네 명의 남녀 무용수가 공연 시간 50분 내내 알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춤을 춘다. 올해 ‘시댄스’ 작품 중 가장 강렬한 누드 공연으로 꼽힌다.

 누드 자체가 관객의 말초적인 호기심을 끄는 게 사실이지만, 무용 관계자들은 상업적인 섹스 마케팅과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장인주 무용평론가에 따르면 ‘외설’과 ‘예술’의 가장 큰 차이는 “관능미의 유무”다. 그는 “무용수들이 옷을 벗는 이유가 몸을 노출시켜 눈요깃거리를 제공하자는 게 아니어서 흔히 ‘예쁘다’라고 생각하는 알몸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했다.

 세계 무용계에선 ‘누드 공연’이 쏟아져나오는 추세다. 국내 무용계는 아직 세계 흐름과는 거리가 있다. 이지현 무용평론가는 “벗은 몸을 터부시하는 유교 문화의 영향 때문에 아직도 국내 무용수들은 전라 공연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도 말했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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