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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김진근이 들려준 故 김진아의 마지막 이야기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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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진아가 지난 8월 20일 하와이 자택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열흘여 뒤 한국에서 그녀의 영결식이 치러졌다. 알려지지 않은 그녀의 투병 생활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배우 김진아를 추억하며….

취재 정은혜, 유재기 기자 사진 이상규(cao studio) OCTOBER 2014아침 공기가 유난히 찼던 지난 8월 31일 새벽 6시.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앞에 도착한 기자는 그 어떤 취재보다 가슴 아픈 현장에 있었다. 1980년대 여배우 중 독보적인 아이콘으로 큰 사랑을 받았던 배우 김진아의 영결식 현장이다. 그녀는 해방 이후 대한민국 최고의 남녀 배우로 손꼽히는 故 김진규와 김보애의 딸로, 본인의 인기에 버금가는 유명세를 얻은 배우였다. 이른 새벽이라 조문객들의 발길은 뜸했지만, 빈소 앞의 수많은 화환이 눈에 띄었다. 조의금은 정중히 거절하되 생전에 그녀가 사랑한 꽃은 감사히 받겠다는 가족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빈소에서는 그녀의 동생인 배우 김진근과 그의 아내인 배우 정애연이 조문객들을 맞았다. 이른 시간이지만 배우 김부선이 빈소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김진아 곁을 지켰다. 지난 이틀간 남궁원, 최수종, 김성령, 박중훈, 민해경 등 동시대를 함께 풍미했던 동료 배우들이 다녀갔고, 그녀의 마지막을 기리며 슬픔을 함께 나눴다.

그녀의 영결식이 가까워 오자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녀의 남편 케빈 오제이와 아들 매튜의 손을 붙잡고 장례식장으로 들어섰다. 지난 이틀간 밤을 지새운 듯 피곤한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그는 매튜와 함께 아내 김진아의 영정 사진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았다. 그의 옆자리엔 김진아의 어머니 배우 김보애씨가 고개를 떨군 채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슬픔을 감추려는 듯 선글라스를 썼지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며 딸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기만 했다. 동생 김진근의 추모사로 영결식이 시작됐다. 케빈은 시종일관 매튜의 몸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자신의 감정은 최대한 드러내지 않은 채 김진아의 사진을 미동 없이 바라보는 모습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김진아의 올케인 배우 정애연 역시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크게 오열하며 눈물로 마지막 인사를 대신했다. 가는 길까지 수많은 동료와 가족들이 지켜준 그녀의 영결식. 곧바로 아들 매튜가 위패를 들고 남편 케빈은 그녀의 유골을 품에 안은 채 유족들과 함께 근처의 호텔로 향했다. 그곳은 생전에 그녀가 자주 들렀던 곳으로, 유골이 하와이에 안치되기 전 마지막으로 방문하는 장소였다. 그 뒤 그녀의 유골은 바로 사랑하는 남편, 아들과 함께 하와이로 옮겨졌다.

1 생전 꽃을 무척 아낀 그녀의 영정 앞은 지인들이 두고 간 꽃으로 가득했다.
2 영결식이 진행되자 남편 케빈은 아들 매튜를 무릎에 앉히고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고, 그녀의 어머니 김보애씨는 흐르는 눈물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낀 채 딸의 영정을 바라봤다.

영결식이 끝나고 며칠 뒤, 배우 김진근이 사는 경기도 용인의 한 조용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테이블 위의 재떨이엔 이미 담배꽁초 몇 개 비가 놓여 있었다. 그의 복잡하고 착잡한 심경을 알 수 있었다.

많이 수척해졌어요 오늘 어머니와 아침 일찍 아버지 빈소에 다녀왔어요. 기자님 오시기 전에 일찍 이곳에 와서 누나의 마지막 가는 길에 시간 내셔서 와주신 분들에게 고마웠다는 연락을 드리고 있었어요. 다들 시간 내서 오셨는데 동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담배를 많이 피우는 편은 아닌데, 한적한 커피숍에 혼자 앉아 있으니 누나 생각이 떠올라서 몇 개비 피우게 됐어요.

김진아씨가 세상을 떠난 정확한 사인이 알려지지 않았어요 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을 때, 대부분은 환자가 겪은 고통의 과정보단 그 병명이 무엇인지에 관해 더 궁금해합니다. 누나가 나중에 무슨 암으로 사망한 배우라고 방송에 나오며 회자되는 게 싫어서 말을 아꼈어요. 누나가 겪은 정확한 병은 경피증이라는 면역 체계 질환이 망가지는 병이었어요. 2010년에 갑자기 이 병을 앓으며 혈액 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몸이 퉁퉁 붓기 시작했죠. 결국 암으로 발전됐고 종양이 발생해 작년 9월 한국에서 제거 수술을 받았어요. 그런데 경과가 좋지 않아 두 달 뒤에 미국에서 재검사를 해보니 새로운 종양이 자라났어요. 다시 독한 항암 치료가 시작되었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0번이나 항암 치료를 받으며 백혈구와 적혈구 수치가 ‘0’일 정도로 쇠약해졌어요. 결국 누나의 몸이 버티질 못한 거죠.

영결식에 가보니 조의금 대신 화환만 받는다는 공지를 봤어요. 다른 이유라도 있었나요 하와이에서 누나의 장례식을 치르고 매형이 제게 의견을 물어보았어요. “진아는 1980년대의 아이콘이었고, 그녀를 기억하는 친구와 팬을 위해 한국에서 한 번 더 장례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녀와 함께 한국에 가자”라며 먼저 말을 꺼냈어요.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을 붙였죠. 마지막 순간까지 꽃을 곁에 둘 정도로 꽃을 사랑한 누나를 위해 꽃은 받되 조의금은 정중히 사양하며, 누구든 누나를 아는 분이면 편하게 와서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계획까지 다 짜주셨어요. 모든 장례 비용 또한 매형이 다 부담했고요. 한국에서의 장례는 전적으로 매형의 의견에서 비롯된 겁니다.

영결식에 가보니 조의금 대신 화환만 받는다는 공지를 봤어요. 다른 이유라도 있었나요 하와이에서 누나의 장례식을 치르고 매형이 제게 의견을 물어보았어요. “진아는 1980년대의 아이콘이었고, 그녀를 기억하는 친구와 팬을 위해 한국에서 한 번 더 장례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녀와 함께 한국에 가자”라며 먼저 말을 꺼냈어요.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을 붙였죠. 마지막 순간까지 꽃을 곁에 둘 정도로 꽃을 사랑한 누나를 위해 꽃은 받되 조의금은 정중히 사양하며, 누구든 누나를 아는 분이면 편하게 와서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계획까지 다 짜주셨어요. 모든 장례 비용 또한 매형이 다 부담했고요. 한국에서의 장례는 전적으로 매형의 의견에서 비롯된 겁니다.

의미 있는 결정을 하셨네요. 정말 꽃이 가득했어요 정말 많은 지인이 조의금 대신 꽃을 주셔서 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요. 그러나 친척분들이나 누나를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제 초등학교 동창들이 얼마 전 찾아와서 조의금을 주더군요. 우리나라의 정서가 그렇잖아요. 아픔은 함께 나누는 그런 부분을 제가 함부로 뿌리치기 힘들었어요. 결국 매형에게 이런 부분을 말씀 드렸어요. 이렇게 모아진 조의금은 누나를 아끼는 분들의 성의이니 매튜에게 전달하고 싶다고요. 매형도 이런 정서를 이해했어요. 매튜가 아직 어리니 매형이 대신 갖고 있다가 매튜가 성장하는 데 요긴하게 그분들의 정성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대화를 나눠보니 매형분이 아내는 물론 그녀의 지인들마저 사랑한 남자 같아요 처남인 저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결혼 후 누나만을 위해 살아왔어요. 결혼 후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셨어요. 남은 인생을 누나와 함께 행복하게 보내고 싶다면서요. 그래서 누나가 아팠을 때 매형은 누나가 겪는 질병을 의사보다 더 파고들어 연구했어요. 책이든 인터넷이든 모든 자료를 뒤져가며 누나의 병을 연구했고 치명적인 병임을 알게 됐죠. 사람이 죽음의 문턱 앞에 놓였을 때 몇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해요. 매형은 발병 초기부터 후까지, 증상은 물론 환자의 심리 상태까지도 파악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기 위해 무척 노력했어요. 마치 호스피스 병동처럼 방 안에 산소 호흡기와 전용 침대를 설치했고, 침대 위치도 창가 방향으로 옮겨 누나가 항상 해변을 바라보며 심리적으로 안정될 수 있게 극진히 간호하며 누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았죠.

엄청난 정성이군요 네. 누나가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날이었어요. 새벽에 매형이 누나가 마지막을 편안한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게 해주려고 누나를 집으로 옮겨 왔어요. 병원 측에선 극구 말렸지만, 누나의 가는 길만큼은 가족과 함께 하게 해주고 싶었던 거죠. 둘이 앰뷸런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얘기를 나눴대요. 둘의 사랑이 정말 깊죠? 그리고 지난 8월 20일 새벽 4시 43분. 가족에게 돌아온 누나는 모두가 함께한 자신의 침실에서 마지막 호흡을 내쉴 때까지 편하게 누워 있다가 천국으로 떠났어요. 혹시라도 그날 누나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더라면 우리는 누나의 마지막을 볼 수 없었을 겁니다. 매형에게 감사해요. 누나의 마지막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다 매형 덕분이에요. 한 여자로서 한 남자의 품에서 행복하게 생을 마감한 누나는 행복했을 겁니다.

모든 가족이 하와이에 가서 임종을 지켰다고요 미국에서 의과대학에 다니는 큰누나의 딸이자 큰조카인 세라가 가장 먼저 학업을 중단하고 지난해 가을부터 올여름까지 누나를 곁에서 간호했죠. 그 뒤 차례대로 어머니가 하와이에 가시고 그다음에는 제가 촬영 스케줄을 다 미룬 뒤, 두 달 전에 하와이로 출발했어요. 한 집안에 암 환자가 생기면 온 가족이 암에 걸리는 것과 같아요. 하와이에서 쓸쓸하게 누나를 보살필 매형과 조카 매튜를 위해 모든 가족이 합심해야 했고, 서로의 삶에 양보가 필요한 기간이었어요. 다만 저는 그 누구보다 누나가 일어날 거란 희망을 가지고 미국에 갔기 때문에 누나와 단둘이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어요. 최악의 상황을 가족으로서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어요? 그냥 웃으며 ‘누나 괜찮아질 거야, 할 수 있어’라는 말만 되풀이했었죠.

눈감는 순간에도 외쳤던 그 이름, 내 아들아

몸이 아닌 가슴으로 낳은 자식 매튜를 그녀는 그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했다.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그녀가 걱정한 사람은 매튜였다. 그녀의 어머니 김보애는 이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으로 울었다. 그리고 딸이 좋아하는 동치미를 해주기 위해 한국까지 다녀왔지만 김진아는 끝내 맛보지 못했다.

영결식 날 어머니께서 선글라스를 계속 착용하고 계시더라고요. 슬픔을 들키지 않으려는 거겠죠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어느 누가 위로하고 가늠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와 이혼 후 어머니는 누구보다 진아 누나를 의지하며 살아왔어요. 그러나 씩씩한 함경도 분이라 힘든 일도 내색하지 않으시죠. 간호하러 미국에 가셨을 때도 매일 이른 새벽부터 음식을 지으며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하셨어요. 그런데 누나가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비자 문제로 잠시 한국에 가셨고 미국에 도착한 그날 새벽에 누나가 세상을 떠난 거죠. 지금도 그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한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고 계세요. 한국에 다녀온 이유 중 하나가 평소 누나가 좋아한 ‘동치미’를 가지고 오려 한 건데, 결국 누나의 시신 옆에 동치미 한 사발을 두고 ‘진아야,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셨죠. 그 좋아하던 동치미를 누나에게 주지 못한 걸 여전히 가슴에 담고 계세요. 혼자 살고 계셔서 제가 모시려 해도 “됐다. 난 혼자 살련다”라고 매번 거절하셨어요. 그러나 이젠 혼자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아요. 제가 모셔야죠.

인터뷰 도중, 그에게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 어머니. 잠깐 나와 있어요. 다리 안 불편하세요? 예, 담배 하루에 한 대만 피워요. 많이 안 피울게요 걱정 마세요”라며 통화를 마쳤다. 암으로 딸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마음은 담배를 태우는 아들 김진근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찬 물음이었을 것이다. 이어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누나를 보낸 뒤 자식들의 건강을 부쩍 신경 쓰고 계신 어머니에게 죄송스럽다며 잠시 담배를 태우지 않겠다고 했다.

매튜는 아직 어머니의 죽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데, 이 힘든 상황을 어떻게 적응하고 있나요 매형이 영결식을 마친 후 매튜를 데리고 곧바로 하와이로 떠났어요. 앞으로 하와이의 집에서 지낼 예정이에요. 현재 많이 슬픔에 잠겨 있지만, 매형은 매튜에게 누나의 병을 숨기지 않고 자세하게 이런 병이며 앞으로 엄마가 떠날 수도 있다면서 현실적인 얘기를 계속해왔어요. 하와이에서는 누나의 시신을 매튜에게 만지게 하면서 ‘매튜야, 엄마는 지금 눈을 감고 누워 있지만 너의 얘기를 다 듣고 있단다. 하고 싶은 말은 귀에 대고 다 하렴’이라며 엄마의 죽음을 감추기보단 느끼게 해주고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고작 열한 살의 어린 나이지만 매튜는 분명히 이 아픔을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걱정되는 건 나이가 어려도 굉장히 속이 깊어서 어른들이 걱정할까 봐 속내를 잘 표현하지 않아요. 하지만 삼촌으로서 누나 몫까지 더 많이 얘기를 해주고 들어줄 거예요.

생전 김진아씨는 매튜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는데, 눈감기 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이 있었나요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자 조금씩 말을 더듬으면서도 곁에 있는 아들 매튜를 바라보며 ‘내 아들 매튜, 사랑스러운 내 아들 앞으로 어떡하니’라는 말을 끝없이 반복했죠. 매튜 역시 ‘엄마 떠나지 말고 내 곁에 있어줘요’라고 울먹이며 외쳤고요. 결국 매튜를 진정시키고 다른 방에 데리고 가서 잠들게 한 뒤 다시 어른들만 모였어요. 저는 누나의 발을 계속 주무르고 있었고, 다른 누나들은 진아 누나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죠. 매형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귀에 대고 ‘진아야 사랑해’라는 말을 되풀이했죠. 그런 편안한 상황 속에서 누나를 보내줬어요. 특별한 유언은 없었지만 제가 발을 만질 때, 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건넨 말은 느낄 수 있었어요. ‘매형과 내 아들 매튜 잘 부탁한다.’

따뜻한 엄마였군요… 진근씨에겐 어떤 누나였나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한 뒤, 누나는 형처럼 저를 보살펴줬어요. 한번은 제가 사춘기로 방황했던 열아홉살 때 아버지를 보러 제주도에 갔어요. 그때 누나가 아버지께 드리라고 편지 한 통을 줬어요. 아버지께선 그 편지를 읽으시더니 갑자기 저를 앞에 앉게 하셨어요. 그러고는 ‘아빠한테 하고 싶은 말 없어?’라며 묻는데 어린 나이에 아버지 없는 빈자리의 서운함을 들키기 싫어서 꾹 참았어요. 시간이 흘러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유품을 정리하는데 두 통의 편지가 남겨져 있었어요. 바로 제가 다녔던 고려대학교 입학 통지서와 그 옛날 누나가 전달하라고 줬던 편지였죠. 온통 저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아버지, 진근이가 아버지가 없는 빈자리를 느끼며 방황을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잡아주시고 많은 대화를 해주세요’라는 내용이더군요. 누나는 제게 씩씩한 형 같은 존재였어요.

스크린의 열정을 사회에 환원한 진짜 배우

김진아는 누구보다 불편한 사람과 고아로 길러지는 아이들을 위해 긴 세월 봉사해왔지만 자신의 그런 행동을 알리지 않았다. 배우가 아닌 한 사람으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오랜 공백을 거쳐 다시 돌아온 연예계가 삭막하다며 자신보단 촬영 스태프를 끝까지 챙겨주는 정을 나눌 줄 아는 그런 배우였다.

긴 공백기를 거치고, 2010년 이후 다시 방송 진출을 하려고 했다고요 이것도 매형의 의견이었어요. 매형은 누나가 항상 여배우로서 활동하길 원했어요. 누나가 배우로서 활동했던 모습을 사랑했었죠. 누나 역시 다시 활동에 기지개를 켜려고 2010년 이후엔 영화 ‘하녀’와 SBS ‘강심장’, MBC ‘황금어장’에도 출연하며 컴백을 시도했고요.

긴 공백기를 거치고, 2010년 이후 다시 방송 진출을 하려고 했다고요 이것도 매형의 의견이었어요. 매형은 누나가 항상 여배우로서 활동하길 원했어요. 누나가 배우로서 활동했던 모습을 사랑했었죠. 누나 역시 다시 활동에 기지개를 켜려고 2010년 이후엔 영화 ‘하녀’와 SBS ‘강심장’, MBC ‘황금어장’에도 출연하며 컴백을 시도했고요.

그러고 보니 함께 드라마에도 출연했어요 2009년에 SBS의 ‘순결한 당신’에 누나와 함께 출연했어요. 누나로서가 아니라 배우로서 바라봤을 때 정말 끼가 아까워서 제가 같이 출연하자고 했죠. 다행히 누나도 받아들여줬고요. 오랜만에 연기를 하다 보니 그동안 바뀐 촬영장 환경에 놀라더라고요. 회식 같은 게 있어도 스태프와 배우가 따로 어울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누나는 항상 다 함께 작품을 만드는 거라며 살갑게 모두를 챙겨주셨어요. 아마 그때 스태프들은 다 알 거예요. 만약에 누나가 지금 살아 있으면서 활동을 이어갔더라면 씩씩하게 촬영장 분위기를 이끌며 배우와 스태프가 하나 될 수 있게 도모하는 여장부 같은 배우였을 거예요(웃음).

남몰래 봉사 활동에 앞장섰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지난 2001년도엔 비영리 단체인 한국 해피타트의 ‘한국 사랑의 집짓기’ 홍보이사로도 활동했고, 입양에 대한 선입견을 바꾸기 위해 고아원에서 수년간 봉사를 해왔어요. 동생인 저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지난 2000년 매형과 결혼 후 2003년에 매튜를 입양하고 나서 누나가 살던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고아원에 일주일에 다섯 번은 찾아가서 수년간 아이들을 돌봐주는 봉사를 실천했어요. 뒤늦게 제가 알자 누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아이를 입양시키는 나라에서 입양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나는 이걸 바꾸고 싶어. 한국으로 입양되는 아이들도 환경이 좋은 외국으로 입양 가는 아이들만큼 따뜻한 정을 느끼며 살 수 있단 걸 알릴 거야’라며 하와이로 떠날 때까지 봉사 활동을 멈추지 않았죠.

누나에게 못다 한 말이 남아 있다면 제가 아는 이 세상의 어떤 여자보다 속이 깊고 아름다운 누나를 난 영원히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야. 하느님 곁으로 떠났지만, 매형과 매튜가 외롭지 않게 잘 챙길게. 우리 가족을 위해 많이 기도해주고, 아버지가 곁에 있으니까 잘 지내고 있어. 다시 만날 때까지 그곳에서 건강하게 있어. 잘 지내고 있겠지, 아무렴 천국일 텐데(웃음).woman.joinsmsn.com

본지에 입양 아들 첫 공개,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기록

1983년 조명화 감독의 하이틴 영화 ‘다른 시간 다른 장소’로 데뷔하며 뜨거운 주목을 받은 여배우가 있었다. 부드럽고 지적인 이미지로 1960년대 당시 모든 여성의 사랑을 독차지한 배우 김진규와 역시 서구적인 외모로 큰 인기를 구사한 배우 김보애의 딸 김진아였다. 지금이야 까무잡잡하고 개성 있는 외모의 배우들도 관심을 받는 시대지만, 그때만 해도 그녀의 등장은 연예계에서 센세이션이었다. 입체적인 마스크로 마치 외국 배우를 연상시키는 그녀는 단숨에 영화계에서 섹시 스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란 작품으로 어머니인 김보애와 출연해 대한민국 최초로 모녀 배우가 같은 영화에 출연한 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김진아는 넘치는 끼와 가족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스크린은 물론 방송 MC로도 활동 영역을 넓혀나갔다. 하지만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인기는 그녀의 심신을 지치게 하였고 결국 1988년 돌연 활동을 접었다.

1 김진아는 지난 2000년 10월, 지인의 소개로 만난 미국인 사업가 케빈 오제이와 결혼하며 국경을 초월한 사랑을 보여줬다.

몇 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뒤 1995년 드라마로 다시 복귀했지만, 데뷔 때만큼의 열풍은 일으키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0년 부동산 투자 신탁 회사인 리먼 브러더스의 수석 부사장 케빈 오제이와 결혼을 했고, 2003년 아들인 매튜를 입양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후 그녀는 매튜와의 행복한 일상을 본지(2007년 5월호)에 단독으로 공개했다. 그녀는 당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매튜가 처음으로 아장아장 걸었을 때, 처음으로 마미라고 불렀을 때, 유치원 입학식 때 씩씩하게 줄 서 있던 아이의 뒷모습을 봤을 때 감동 그 자체였다”며 “매튜는 나와 남편에게 형용할 수 없는 행복을 안겨주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물론 연기도 하고 싶지만 아이에게 지금이 정서적으로 중요한 시기라 엄마 노릇에 집중하고 싶다”며 “매튜를 입양한 건 내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전했다. 그렇게 그녀는 남편 케빈과 매튜와 함께 한국생활을 접고 하와이로 떠났다. 그로부터 2년 뒤, 2009년 동생 김진근과 함께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을 계기로 숨겨온 연기 열정을 쏟아낸 그녀는 영화 ‘하녀’와 각종 공중파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는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그해에 경피증이 찾아왔고, 치료를 위해 모든 연예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녀의 나이 쉰한 살이었다.

2, 3 본지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그녀는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본인의 집으로 취재진을 초대해 아들 매튜와 행복한 삶을 보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때에도 그녀는 집 근처의 고아원에 남몰래 찾아가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4 데뷔 1년 만에 당대 최고의 남자 배우 신성일과 ‘지금 이대로가 좋아’(1984)를 촬영한 뒤 그녀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5 한국의 ‘샤론 스톤’이라 불리며 섹시함과 순수함이 공존하는 외모와 당당한 성격으로 1980년대 모든 남성 팬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0대의 젊은 나이엔 화려함을 누렸지만 30대 때부턴 입양아를 위한 봉사 활동을 하며 과거의 영광을 내려놓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김진아. 마음으로 낳은 아들 매튜가 성장해 친부모를 만나길 원한다면 상봉도 주선해주겠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그녀의 죽음이 한없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글=정은혜·유재기 여성중앙 기자, 사진=이상규(cao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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