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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외교 속 파격외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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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호 30면

미국 시카고대의 존 미어셰이머 교수는 2000년대 초반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이라는 책을 저술해 일약 세계적인 국제정치학자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그는 영국·중국·러시아·독일·이탈리아·미국 등 역사상 강대국들의 대외정책을 분석했다. 그는 지역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안전보장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책으로서 육군력 및 해군력을 포함한 세력 확대를 단행해 패권국이 되려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국제정치는 패권국을 지향하는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세력 경쟁이 펼쳐지는 ‘비극의 무대’라고 보았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과연 강대국들의 성향이 팽창주의적 속성을 갖고 있고 국제정치가 비극의 경연장일까라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최근 지역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과 기존의 대국을 자처하던 일본이 동아시아 무대에서 펼치는 대외정책의 양상을 생각하면 미어셰이머의 통찰이 어쩌면 정곡을 찌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경제력과 군사력 면에서 세계 2위 수준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첨단 해군력과 공군력을 지속적으로 증강하면서 동중국해·남중국해 등에서 영유권 주장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그 주변 공역을 포함한 방공식별권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반면 이에 대해 일본은 지난해 말 공표한 국가안보전략서와 방위계획대강에서 중국의 첨단 군사력 증강 및 해양 진출 동향을 잠재적 위협으로 명기하면서 평화헌법 체제하에서 보유 자체가 금기시됐던 해병대 전력의 창설을 선언했다. 한때 일본은 ‘종합안전보장’의 개념을 제창하면서 비전통적 안보 개념까지 포함한 포괄적 안보정책을 선도적으로 추진한 국가였지만 현재의 일본은 오히려 군사안보에 편중된 대중 정책에 기울고 있다.

21세기의 동아시아는 중국과 일본 등 지역 강대국들의 세력 확대 경향이 노골화되는 ‘비극적 국제정치의 무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과 같은 상대적 중견국이 ‘아시아 비극’의 도래를 예방하고, 나름의 안보와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자외교뿐 아니라 다자간 외교무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1966년 주도적으로 아시아·태평양이사회(ASPAC)를 결성한 이래 역대 한국 지도자들이 동아시아 지역 내의 다자간 협의체 결성과 활용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은 나름대로 중견국으로서의 생존을 위한 현명한 외교전략이었다고 할 것이다.

동아시아 비전그룹의 발족이나 한·중·일 정상회담의 정례화 및 협력사무국 발족 등은 지금도 여타 역내 국가들이 평가하는 한국 다자외교의 성과들이다. 박근혜 정부도 기회 있을 때마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및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등 다자간 협력 제안을 해 왔는데 이제는 구체적인 결실을 봐야 할 시기다.

다만 다자간 무대에서 입장이 다른 타국들을 상대로 공감을 얻어내고 협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가끔은 상대국들의 의표를 찌르고 예상을 뒤엎는 메시지의 발신과 행동이 필요할 때도 있다. 16일부터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개최되는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도 좋고 다음달에 베이징과 미얀마, 그리고 호주에서 연속 개최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동아시아 정상회의, 그리고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도 좋다. 중국과 일본의 계속되는 군사적 대립을 완화하고 동북아 평화협력을 구현하기 위해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한·중·일 3국 정상회담 개최를 제안하는 것은 어떨까. 혹은 남북한 신뢰프로세스를 가속화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다자간 회의에 북한 정상을 옵서버로서라도 초대하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파격의 제안을 통해 ‘아시아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는 중국과 일본을 화해협력의 길로 유도하고 북한의 핵폐기와 개혁·개방을 촉구한다면 평화적 가교국가로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보다 증진되는 효과도 클 것이다. 66년 6월 한국 최초로 주도한 아시아 지역 다자기구였던 ASPAC이 결성될 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참가 10여 개국에 ‘평화와 자유, 균형된 번영의 위대한 아시아·태평양 공동사회’를 건설하자고 호소했다. 다른 대국들의 정치가에게 과감한 역사 반성을 통해 아시아의 지도자가 돼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와 병행해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아시아·태평양 공동사회’를 견인하는 다자외교의 구상력과 지도력을 발휘할 시기다.



박영준 일본 도쿄대 국제정치학 박사, 미국 하버드대 초빙교수, 주요 연구로 『제3의 일본』 『안전보장의 국제정치학』 『21세기 국제안보의 도전과 과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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