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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한 이혼을 위한 조건

중앙일보

입력

한국의 경제발전으로 지난 20년간 여성의 사회ㆍ경제적 지위는 급상승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대학교육을 받게 됐고 전문직을 갖고 있는 여성 수도 크게 늘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남편의 퇴직연금과 관련된 대법원의 이혼소송 판결은 여성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대법원은 최근 두 건의 판결에서 남편의 퇴직연금 분할비율을 각기 달리 산정했다. 전업주부에게는 35%를, 맞벌이 아내에게는 50%의 분할비율을 결정했다.

첫 번째는 34년 동안 결혼생활을 한 부부 케이스다. 대법원은 공무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남편이 매달 받는 314만원 정도의 연금에서 35%를 아내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아내는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두 자녀를 키운 전업주부였다.

두 번째 케이스는 31년간 결혼생활을 한 부부간 소송으로 남편이 퇴직연금의 50%를 아내에게 양도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아내가 의류 관련 자영업을 운영했던 만큼 가계소득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들은 향후 유사한 소송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전의 퇴직연금 분할 재판 결과를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1995년 판례에서는 재판부가 향후 받게 될 연금에 대해 이혼을 하더라도 분할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를 감안할 때 최근 판결은 긍정적인 진전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특히 연금분할 비율의 기준이다. 전업주부와 맞벌이 아내에 대한 평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을 가진 아내의 기여도를 높게 평가한 반면, 전업주부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저평가한 측면이 있다. 이런 판단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과거의 인식과도 맥을 함께 한다. 한국에서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꾸준히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사회·문화적 관습으로 인해 아내는 결혼생활에서 남편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여성의 사회 진출은 확대될 것이다. 이로 인해 남편이 아내에게 바라는 것과 아내의 역할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도 증폭될 수 밖에 없다.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있는 황지수씨는 이와 관련 이런 진단을 내렸다. “한국 사회가 빠르게 발전한다는 것은 기혼여성의 사회진출 기회가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만큼 가정주부로서의 역할 축소도 동반하게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국가경제에서 여성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주된 이유로 임신과 출산, 자녀 양육 등을 들고 있다. 여성이 자녀를 돌봐야 한다는 인식이 여성의 사회적 성취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여성 취업과 관련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OECD 국가들 중 한국은 대졸 여성들의 취업률이 고졸 이하 여성 취업률보다 낮은 유일한 나라다. 둘째, 한국의 여성 취업인력 중 파트타임 일을 하는 비율은 다른 OECD 국가 평균의 두 배가 넘는다. 셋째, 경력단절을 겪은 40대 여성들은 사회에 복귀했을 때 저임금 일자리로 밀려난다.

이런 구조에서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한 전업주부 여성이 이혼을 할 경우 노후대비는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취약할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10년 이상된 부부가 이혼을 할 경우 재산분할 비율을 50대 50으로 정하는 것을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결혼은 동등한 부부간의 결합이다. 각자의 기여도도 공평하게 평가돼야 한다. 가정과 사회를 위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기여를 한 여성들이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버틸 피터슨 보스톤 글로브 등 미국의 주요 신문사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이집트 미국상공회의소가 발간하는 ‘월간 비즈니스’ 편집장을 지냈고, 현재 코리아중앙데일리 경제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버틸 피터슨 코리아중앙데일리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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