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문영의 호모 디지쿠스 <2> 신동·택포·박풀 뒤지다가 멋진 인연까지 득템한다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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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영

낯선 사람을 기대하며 설렐 때가 있다. 여행 가는 기차 안이나 퇴근길 버스 옆자리에 ‘누가 앉을까’ 궁금해할 때처럼 말이다. 그런데 일상에 바쁘다 보면 여행할 일이 많지 않고, 어쩌다 옆에 누군가 앉더라도 말을 주고받을 명분이 없다. 아주 작은 설렘조차 없이 반복되는 일상은 너무 삭막하다.

 그런데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다. 바로 중고물품 직거래 현장에서다. 할아버지와 대학생이 만나기도 하고, 여고생과 아줌마가 거래를 하기도 한다. 유부남들은 아내 몰래 비자금을 만드느라 거래를 비밀에 부치는 일도 있다. 신형 휴대전화가 갖고 싶은 중학생은 “나중에 돈 모아 갚을 테니 먼저 줄 수 없느냐”고 생떼를 부리기도 한다.

 가끔 사기꾼도 있고 몇 푼 더 아껴 보려고 다른 사람인 척 속여 가며 물건 값을 흥정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중고거래 시장은 알뜰한 시민들의 즐거운 인연 만들기 장터다. 그러다 보니 신동(신품과 동급), 택포(택배비 포함), 박풀(박스째 모두 있다), 실사(실제 사진), 부처님(구매하려는 사람의 온갖 질문에 끝까지 친절하게 답변해 주는 사람) 등 이 바닥 전문용어도 많다.

 인터넷에는 거의 매일 ‘오늘도 평화로운 중고나라’라는 글이 올라온다. 일종의 반어법으로 중고나라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다는 뜻이다. 중고나라는 회원 1200만 명이 넘는 대표적인 인터넷 카페다. 포털의 검색 능력 덕분이다. 뭔가를 올리면 포털에서 바로 검색되니까 거래도 잘 이뤄진다. 그러다 보니 중고물품 거래의 대명사가 됐다.

 최근엔 ‘중고나라 로마법’(일명 오로지 사건) 사건이 터졌다. 한 이용자가 마작용품을 판매한다는 글을 올렸는데 운영진 중 한 명이 이를 사행성 물품으로 판단해 해당 이용자를 강퇴(강제탈퇴)시킨 것이다. 사건이 터지자 많은 회원이 중고나라 사행성 물품의 기준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운영자는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르라’며 이에 반발하는 회원들에게까지 ‘재가입 불가’ ‘영구 탈퇴’ 등의 극한 처분을 내려 사태가 확대됐다. 심지어 그 운영자는 강제탈퇴 사유를 ‘정신병자’로 명시하는 바람에 회원들의 분노를 샀다. 일명 ‘영자의 완장질’ 사건이다. (운)영자의 권한을 남용한다는 뜻이다.

 이에 회원들은 중고나라를 로마제국에 빗대 ‘신성중고제국’ ‘로마중고나라’ 등으로 부르며 비난과 야유를 퍼부었다. 댓글을 막자 답글로 글을 썼다. 중고나라의 기업형 운영에 대한 비판도 제기됐다. 운영진은 사과문을 올리고 수습에 나섰지만 신뢰도에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 중고거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일상이 됐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극심한 불경기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한 푼이 아쉬운 시민들에게 중고거래는 살림비용을 아껴 주는 생활방식이 됐다. 단순한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알뜰한 누군가를 만나는 기대와 설렘을 주는 생활의 이벤트다.

 그래서 맘에 드는 물건을 얻고 쿨한 거래 상대를 만나면 즉석에서 차비를 깎아 주기도 한다. 상대가 어린 학생이면 함께 산 액세서리를 덤으로 그냥 주기도 하고, 상대가 기기를 잘 모르는 어르신이면 지하철 계단에 앉아(보통 직거래는 지하철역에서 많이 한다)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고 힐링이다.

 최근에는 한 거래자가 물건을 사려고 판매자에게 자신의 주소를 알려 주니 상대방이 주소를 보고 웃음을 터뜨린 사연이 소개됐다. 잠시 후 그 판매자는 “저 윗집 살아요”라고 알려 왔고, 신기한 인연에 놀란 두 사람은 즉시 계단에서 만나 거래했다고 한다. 또 다른 사연은 더 신기하다. 물건을 팔려고 내놓았더니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의 주소가 같았다. 알고 보니 룸메이트끼리 서로 모르고 각각 거래를 요청했던 것이다.

 인터넷이 맺어 주는 새로운 인연이 가끔 선남선녀에게도 닿을 때가 있다. 특히 처녀·총각들은 중고거래를 하면서 또 다른 인연을 기대하는데, 거래할 때 휴대전화 번호로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고물품을 거래하다가 만나 결혼했다는 사연은 아직 못 들었지만 어딘가에는 새로운 인연이 또 생기고 있지 않을까. 오늘도 중고나라는 평화롭다.

임문영 seerl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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