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보루에 3000원 싸" 면세담배 은밀한 거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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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풍물시장의 한 건강식품 매장에서 가게 주인이 불법 면세 담배를 꺼내고 있다. 한 보루당 2만원 선에서 거래되던 면세 담배는 지난 9월 담뱃값 인상안 발표 후 가격이 올랐다. [장혁진 기자]

지난 7일 오전 서울 신설동역 8번 출구 옆에 있는 한 공원. 한쪽에서 노인들끼리 술판이 벌어졌다. 취기가 오른 이들은 옆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뱃갑에는 ‘면세용(Duty Free)’ 글자가 선명했다. 기자가 “어디서 이 담배를 구하셨느냐”고 묻자 아무 말 없이 동대문 풍물시장이 있는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곧바로 풍물시장으로 가서 상인들에게 “면세 담배를 사러 왔다”고 하자 판매대가 있는 위치를 알려 줬다. 비타민 등 각종 영양제 등을 파는 건강식품 가게였다. 어디에도 ‘담배’라고 적힌 간판은 없었다. 가게 주인에게 “에쎄(ESSE) 면세 담배 한 보루 사겠다”고 하자 주인은 두리번거리다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테이블 밑에서 종이박스를 꺼냈다. 박스 안에는 면세 담배 30~40보루가 가득 들어 있었다. 주인은 검은 비닐봉지에 담배를 넣어 건네며 “2만2000원”이라고 했다. 한 보루에 10갑의 담배가 들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한 갑당 2200원 수준이다. 시중가보다 300원 싸다. 계산을 한 뒤 기자 신분을 밝히고 대화를 나눴다.

 - 면세 담배는 어디서 구했나.

 “미군부대 매점(PX)으로 납품되는 물건으로 알고 있다. 운반책이 이곳과 동묘시장·남대문시장 등에 매달 박스째로 배달해 준다. 보루당 1만9000원 정도에 산다.”

 - 불법인 것은 아나.

 “알지만 단골들이 많아 장사를 그만두기가 쉽지 않다. 나이트클럽 같은 데 대량으로 넘기는 ‘큰손’들에 비하면 나는 형편 어려운 노인들 대상으로 용돈벌이 하는 수준이다. 요즘 많이 힘들어졌다.”

 -담뱃값 인상 때문인가.

 “맞다. (인상 발표 후) 물량을 구하기 어렵다. 지난달까지 (한 보루당) 2만원에 팔다가 최근 가격을 올렸다. 이제 그만 물어봐라.”

  이 구역 관할 동대문경찰서를 찾아가 면세 담배를 보여 주니 경찰은 소극적 반응을 보였다. 경찰 관계자는 “시·구청에서 면세 담배 파는 업자를 고발해 담배사업법 위반으로 입건한 적은 있지만 따로 단속을 나가지는 않는다”며 “수사계획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서울시내의 담배 수입·판매업 행정지도 및 관리감독 업무는 시청·구청이 맡고 있다. 서울시청 관계자는 “불법판매에 대한 민원이 들어오면 경찰에 고발하지만 별도 단속은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11일 정부가 담뱃값 인상안을 발표하면서 값이 싼 면세 담배를 몰래 거래하는 불법유통 시장은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9일 박맹우 새누리당 의원실이 관세청으로부터 제출받은 ‘담배 불법유통 적발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적발 규모는 약 437억원이었다. 이는 전년도에 비해 13배가량 는 것이다. 올해 1~8월 적발 규모는 664억원 수준으로 사상 최대치였다. 2010년부터 올해 8월까지의 불법판매 금액 1288억여원에 담배의 제세 및 부담금 비율(62%) 기준을 적용하면 약 798억여원의 세금이 새어 나간 것으로 추산된다.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면세 담배들은 주로 미군부대에 납품되는 물건을 빼돌리거나 공항·항구 등에서 밀수를 통해 공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에는 수년간 면세 담배를 국내에 몰래 유통시킨 업자에게 금품을 받은 KT&G 인천공항지점장 강모(47)씨와 밀수업자 등 6명이 검찰에 구속 기소됐다. 지난해 4월 경기도의 한 미군부대에서 불법유출된 면세 담배 22만 갑을 적발해 낸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양영구 팀장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차량은 제대로 검문검색을 안 한다는 점을 노려 매점 상인들이 트렁크에 면세 담배를 수십 보루씩 싣고 나간다”며 “ 유출된 담배는 시장·파고다공원·함바식당 등으로 간다”고 설명했다.

 담배 불법유통에 대응하기 위해 관세청은 면세 담배의 제조부터 최종 판매까지 모든 단계를 관리하는 ‘면세 담배 통합관리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담배소비자보호협회 최비오 정책부장은 “호주는 2010년 담뱃값 인상 후 불법담배가 전체 유통량의 20%에 달했다”며 “담뱃값이 인상되면 동남아시아를 통해 들어오는 값싼 불법 면세 담배가 많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맹우 의원은 “관세청이 검·경·지자체와 협조해 담배 불법유통을 뿌리 뽑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장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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