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278)제75화 패션 50년(59)|보세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70년대 중반 우리네 의생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에 「보세집」이 있다.
그 정확한 의미도 모르는 어린아이들까지 쉽게 입에서 나오는 대로 『보세집에서 샀다』 는 말을 곧잘 할 만큼 우리 생활에 깊이 들어와 있는 보세라는 말은 원래 원자재를 수입해서 보세 가공하여 다시 수출한다는 뜻의 경제용어다.
비교적 일손 구하기가 쉽고 임금이 싼 우리나라에 세계 섬유업자들이 몰려들면서 그네들의 원단과 패턴을 들여다 봉제과정만 여기서 해내는 보세가공 공장이 전국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70년대에 들어와서 부터였다.
이 같은 보세품 공장에서 간혹 검사과정에서 불합격된 하자있는 제품들이 한두점씩 시장으로 흘러나온 것이 7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붐을 이룬 보세집의 시초인 셈이다.
수입원단이므로 흔하지 않고 서구적인 모던한 분위기에 값도 싸다는 것이 커다란 매력이 되어 젊은 층의 보세상품에 대한 기호가 높아지자 처음에는 한남동 일대에만 있던 보세집이 명동 한복판이나 아파트 상가에까지 우후죽순처럼 돋아났다.
이렇게 되자 그 많은 보세집마다 산처럼 쌓인 상품중에 진짜 보세품은 과연 몇가지나 될까하는 의문과 함께 보세를 좋아하는 풍조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기도 했다.
보세를 좋아하는 심리는 과거 외제를 찾던 허영심과 오십보 백보로서 가짜를 진짜로 속아 사기 십상인 점까지 닯았다는 것이었다.
사실이지 외국 업자들로부터 일정한 만큼의 원단을 제공받아 정해진 수량의 완제품을 생산, 수출하는 보세가공업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보세집이라는 간판을 단 그 수많은 상점마다 가득 들어찬 각종 상품들이 모두 진짜 보세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쩌면 그 10분의1도, 아니 어쩌면 그 전부가 보세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국내 원자재로 만들어진 1백%가짜 보세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다른 의류가게들이 불경기에 허덕이는데 보세집에만 유독 소비자들이 몰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외제를 좋아하는 허영심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반대로 어느 나라 제품이라든가 무슨무슨 유명메이커의 기성복이라는 식으로 상표에 혹해서 아낌없이 비싼 값을 지불하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실리를 취하게된 소비자의식의 각성으로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 같다.
10년전만해도 여대생들이 부모한테서 타낸 돈으로 명동에 나와 웬만한 샐러리맨 한달 봉급과 맞먹는 거금을 아까운 줄 모르고 옷 한벌 마추는데 써버리던 철없는 시절에 비기자면 요즈음 여대생들은 영악할 이만큼 경제의식이 투철하다.
예전 그녀들의 선배들이 얼마나 비싼 옷을 입었느냐로 학우들간에 베스트 드레서를 겨루었다면 요즘 여대생들은 얼마나 싼값으로 멋을 냈느냐를 놓고 다툴 만큼 젊음에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연출할 줄 아는 진짜 멋장이들이다.
드레시한 하이패션의 실크드레스에다 하이힐의 살롱 수제화를 신고 강의실에 나타나는 아가씨는 시골뜨기 취급을 받을 만큼 캠퍼스 웨어에 대한 자각도 뚜렷하다.
아무 의식없이 어머니나 언니들의 성숙한 모드를 흉내내던 시행착오에서 깨끗이 벗어나 자신들의 매력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참된 영 패션이 확립된 것이다.
여자대학교 앞에 책방은 없고 양장점만 즐비하다는 비난도 요즘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고 한다.
양장점이 많은 것은 예전이나 마찬가지지만 그 양장점들의 단골손님은 그 학교 재학생들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일반고객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여대생 자신들의 건실한 패션의식을 따라 이 2, 3년래 패션산업도 20대 전후 연령층을 위한 캐주얼웨어만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진짜 멋을 알고 계산에 밝은 알뜰파 여대생들은 이 같은 캠퍼스 웨어 전문점조차 마다하고 지금도 보다 싸고 독특한 그 무엇을 찾아 보세집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들 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