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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3266>|제75화패션50년 (47)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우리나라에서 뒤늦게 받아들인 미니 모드가 피크를 이룬 68∼69년 무렵 세계적인 패션의 흐름은 남성들이 컬러풀하고 장식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피코크혁명이라 불리는 유행을 이룬 반면 여성들은 반대로 큘롯 스커트와 팡탈롱수트등 팬츠 루크가 대 유행을 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남성들의 의상은 여성화하고 여성들의 의상은 남성화합으로써 인류 역사이래 명확하게 구분되어온 남녀 의상의 차이가 희미해지게 된 셈이다.
이래서 탄생된 새로운 유행어가 유니섹스-. 여성용 블라우스가 셔츠 스타일로 바뀌고 티셔츠나 스웨터가 남녀공용으로 만들어지는 등 60년대말의 세계는 바야흐로 유니섹스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팬츠 루크의 기수는 프랑스의 젊은 남성디자이너요, 당시 세계5대디자이너의 한사람으로 꼽히던 「이브·생·로랑」-. 그가 66년 봄·여름컬렉션에서 야회복으로 바지를 내놓자 전세계 패션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 때까지의 사회통념상 여성의 바지차림이란 스포츠웨어나 작업복등 정장이 아닌 경우에만 용납이 되어 왔었다.
그런데 가장 우아해야할 야회복으로 바지를 등장시킨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세계 유행을 좌우하는 일류 디자이너의 영향력은 놀랄만한 것이어서 68년 가을쯤엔 파리의 의상점들은 밀려드는 바지주문을 감당하느라 바빴다.
그러나 가장 모던하다는 미국에서조차 여성의 바지차림을 정장으로 받아들이는데는 다소 완고해서 시카고의 맥심같은 일급 레스트랑에서는 바지입은 여성의 출입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는것이 외신보도였다.
그러나 미니를 받아들이는데 오래 주저하던 한국여성들이 이 바지 차림을 받아들이는데는 의의로 용감하고 적극적이었다.
아직 팡탈롱이라고 부르기엔 바지통이 약간 덜 넓은 나팔바지가 서울거리에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68년 가을께부터였다.
이전까지 바지에 곁들이던 스웨터나 점퍼 혹은 반코트대신 같은 감으로 만든 남성용 신사복 상의를 방불케하는 테일러드 재킷을 걸치고 그 안에는 셔츠 블라우스에 넥타이까지 맨 모던 걸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이다.
더불어 긴 바지를 무릎 근처에서 잘라낸듯한 큘롯 스커트-속칭 치마바지-도 역시 같은 감으로만든 셔츠나 재킷과 한짝을 이뤄 젊은이들사이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오히려 서구에서는 저항이 큰 팬츠 루크가 보수적인 전통사회인 우리나라에서 의외로 수월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일제시대때 몸빼를 입었던 경험이 있는데다 6·25의 어려운 세월을 지내는동안 활동복으로서 바지가 갖는 편리함에 익숙해진 탓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다 난방시설이 미흡한 상황에서 추운 겨울을 나려면 여성들도 곧잘 오버코트나 반코트 밑에 바지를 입던 당시 관습이 이 팬츠 루크를 받아들이는데 별다른 저항감을 못느끼게 한 것 같다.
그러나 작업복으로서 편하다거나 추운 날씨에 적당해서 입어오던 바지차림이 정장으로 받아들여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당시 구두유행 경향에 힘 입은 바 크다.
예나 이제나 여성용 정장에는 굽높은 구두가 필수인데 이전까기는 굽 높은 구두라면 끝이 뾰족한 하이 힐이 유행의 주류를 이뤘기때문에 바지차림에는 걸맞지 않았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부터 유행한 뭉툭한 미둘 굽은 바지차림에 안성마춤이어서 새로 나팔바지와 재킷을 입는 경우도 구두만은 따로 마출 필요가 없다는 경제적인 잇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팡탈롱이라 부를만큼 통넓은 바지가 유행의 물결을 타기 시작한 것은 나팔바지가 선보인 한해뒤인 69년 가을깨부터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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