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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262>|제75화 패션 50년 (43)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60년대가 후반으로 기울면서 우리 복식업계에는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때까지 명동을 중심으로 한국의 의상패션을 리드하던 큰 양장점들이 차차 퇴조하고 의상실이란 이름의 새 경영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양장점하면 마네킹이 멋진 옷을 입고 서있는 쇼윈도가 먼저 연상될만큼 그 당시의 양장점은 으례 큰 길가 건물의 1층에 자리잡고 가게 전면을 크고 화려한 쇼윈도로 장식해서 지나는 고객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곤 했다.
그러나 이처럼 번화한 거리의 대로변 건물 1층을 세얻자면 비용이 대단히 많이 들었다.
그러므로 60년대 들어서 배출되기 시작한 젊은 디자이너들이 기존 스타일의 양장점을 차린다는 것은 경제여건상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의상실이란 이름의 새로운 양장점 형태다.
우선 기존 양장점의 입지조건이었던 번화가 대로변 건물 1층이란 정석을 깨고 세가 싼 뒷골목 건물의 2충이건 3층이건 가리지 않고 점포를 열었다.
점포면적도 이전처럼 넓지 않고 오히려 옹색하다 싶을이만큼 작은 글방들이 대부분이었다.
쇼윈도는 물론 없었고 실내장식도 대부분 디자이너 자신의 아이디어와 솜씨로 소박하면서도 개성있고 참신하게 꾸며서 고객들에게 친구집을 방문한듯한 친밀감을 느끼게 했다.
좀더 여우가 있고 고답적인 멋을 추구하는 이들 중엔 아예 옷감의 진열 따위는 치워버리고 유명화가의 그림을 걸거나 클래식 음반을 준비해서 화가의 아틀리에나 예술사진작가의 스튜디오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고답적인 실내 분위기는 한쪽은 옷을 사고 또 한쪽은 옷을 판다는 상거래 행위, 즉 장삿속에 대한 의식을 무디게 하는 예상밖의 효과까지 있어서 그때까지 양장점에서 흔히 있어 오던 옷값 흥정이나 에누리가 저절로 사라지는 구실까지 했다.
뿐만아니라 일부에 그치는 일이긴 했지만 몇몇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디자이너의 의상실에서는 감히 의상 값을 묻는다는 것이 디자이너의 작가적 품위를 훼손하는 무교양하고 몰상식한 행위라는 식의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그래서 고객들은 돈내고 옷 해 입는 것이 마치 고명한 예술가의 작품을 입게 되어 영광인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렇지않은 경우라도 미리 옷값을 따져 묻지 못한 탓에 나중에 발부된 엄청난 청구서를 항의조차 못하고 지불하는 난센스도 심심챦게 발생했다.
이렇듯 처음엔 양장점을 차릴 경제력이 없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의상실이 투자비용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옷값을 기존 양장점보다 더 높게 받음으로써 그때까지 여성용 양장보다 남자 신사복이 더 비싸던 전통을 깨는 간접적 역할까지 했다.
물론 이런 현상이 일어나기 까지엔 일부 헛된 명성과 출세욕을 앞세운 몇몇 디자이너들의 탓이 크다.
그러나 『싼 게 비지떡』이라든지, 『모르면 엎어놓고 돈 더 추라』고 한 우리네 속담을 철저하게 신봉하는 일부 몰지각한 여성들이 무조건 값만 비싼 옷과 하이패션을 동일시하는 태도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같다.
그러나 이처럼 역기능적인 면도 없지 앉았던 반면 착실한 운영으로 넓은 층의 고객을 확보함으로써 백화점등에 기성복코너를 여는등 부틱으로까지 발전한 이들도 많다.
아뭏든 대규모 기성복 메이커가 출현하기까지 과도기적 현상으로 등장한 의상실은 그때까지 자본을 가진 양장점 주인 밑에서 고용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디자이너의 헌신적 지위를 탈바꿈시키는데 크게 한몫을 했다고 높이 평가할만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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