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안 떨어지려 떼쓰던 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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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낳았지. 그지, 응?』다섯 살 난 손자 섭이가 밖에서 놀다가 급히 뛰어들어오면서 큰 소리로 외친다.
『영식이는 걔내 엄마가 낳았다는데 나는 우리 할머니가 낳았지? 그-때 그때 응?』
나는 무어라고 대답해야할지 당황했다. 갓 낳았을 때부터 엄마가 직장생활로 바빠 내가 데려다 기른 우리 첫 손자 섭이는 엄마보다도 할머니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고 저는 꼭 할머니가 낳았다고 주장한다.
지난77년7월에 안양에 물난리가 나고 그 일주일 후에 우리 섭이는 갑자기 다리를 못쓰는 이상한 병에 걸렸다. 다섯 살 난 어린것이 무서운 병마와 싸워 이겨야 하는 큰 수술을 하는데 그렇게도 잘 참고 착하게 의사선생님의 지시대로 잘 따랐다. 내일이 특수촬영을 하는 날이면 오늘 저녁부터 금식에 들어간다. 어린것이 그 좋아하는 바나나도 먹지 않고 참으면서 코에 갖다대고 냄새만 맡는다.
『할머니, 저 푯말 갖다 버려!』
「절대금식」이라고 쓴 하얀 푯말을 침대에 걸어놓은 간호원 언니가 미운 것이다.
『할머니, 밥 먹어. 내가 눈 꼭 감을께 빨리 먹어 응?』금식하는 섭이가 안타까와서 차마 먹지 못하는 이 할머니의 배가 고프리라고 걱정하는 어린 우리 섭이, 너무너무 착하게 말 잘 듣는 섭이를 보고 의사선생님들이 어떻게 키우면 이렇게 착하게 되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배에서 다리 발끝까지 기프스를 하였다. 엉덩이뼈를 조금 잘라서 다리뼈에다 이어주는 큰 수술을 어린것이 참고 견디면서 투병을 한다.
날이 감에 따라 기프스를 풀어내 구두 달린 쇠 기프스로 바꾸고 양다리를 90도 각도로 벌여 놓았다. 밤낮을 가릴 것 없이 구두를 신은 채 두 다리를 쭉 뻗고 자는 우리 섭이의 두 다리가 얼마나 아플까를 생각하면 안스러워 밤잠을 못자기도 했다. 퇴원 후에 집에서 요양하는 섭이를 보겠다고 온 동네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차례대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섭이 차례엔 누워서 노래만 한다. 박수갈채가 터져 나온다. 암흑 같았던 무서운 세월이 말없이 흘렀다.
『할머니!』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우리 섭이 머리가 다팔다팔 바람에 휘날리고 등에 멘 가방을 이리저리 덜렁덜렁 흔들면서 양팔을 쫙 벌리고 뛰어오는 섭이가 왈칵 달려든다. 가슴이 도근도근 뛰는 소리가 나의 가슴에 와 닿는다. 할머니가 낳았다고 우겨대던 우리 섭이도 그 시련을 겪으면서도 어김없이 성장해갔다.
『할머니 나는 큰아들이니까 엄마하고 아빠하고 살아야 한대.』
『누가 그러든?』
『이모가 그랬어.』
아파트로 이살 하는데 저는 할머니하고 살겠다고 떼쓰던 섭이가 이제는 맏아들로서의 책무까지를 어느 틈에 인식하고있지 않는가. <경기도 안양시 박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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