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기<25새>자신의 부만 이웃에 풀어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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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높은 빌딩에 올라 시내를 내려다보면 그럴듯하고 멋지다.
높고 낮은 건물들의 조화, 제자리를 잡아 달리는 차량들, 한가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얼핏 세상은 참으로 평화와 질서가 충만된 곳으로 착각된다.
그러나 막상 거리로 나서면 어떤가? 흐느적거리며 밀리는 인파는 서로 부딪치고, 갈곳이 바쁜 차량은 뒤죽박죽 거리를 메우고, 현란한 불빛, 소음이 어지럽다.
늦가을 찬바람과 함께 전해지는 「잔인한 소식」이 계절의 스산함을 더욱 실감케 한다.
역곡아파트 모녀살인·방화, 아기 못 낳는 여인의 남편 살해, 부산 주부피살사건…. 하루가 멀다하고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끔찍한 뉴스가 우리를 경악케 한다.
여대생 피살사건에 뒤이어 끊임없이 전해지는 사건들을 접하다보면 이 세상이 온통 「악의 소굴」로만 느껴진다.
더구나 순간적인 충동을 못 이겨 유부녀를 욕보이고 아기와 함께 살해한 뒤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방화까지 서슴지 않은 두 젊은이의 악행은 몸서리치게 한다. 「동기없는 살인」-자신의 불만과 증오심을 아무 관계없는 제3자에게 전가한 범죄를 어떻게 보아야 하나.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다 해서, 사회에 대한 불만과 증오를 가졌다해서 이웃에 분풀이들 해야하는 것일까.
물론 어려운 환경에서 괴로운 생활을 하며 불만을 키워왔을 범인들의 불운을 인간적인 연민으로 동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죽음을 당한 두 모녀의 허무함과 살아남은 아버지, 남편의 충격을 범인들은 짐작이나 했겠는가.
자기의 불운과 불만을 애매한 제3자에게 돌려 그들을 짓밝고 그들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다.
더욱이 불행을 당한 부부도 어려움을 이기고 이제 겨우 아파트를 얻어 행복을 키워가고 있는 비슷한 환경의 선량한 이웃이 아닌가.
우리 사회는 궁극적으로 나 혼자 살아가는 장소는 아니다.
나와 함께 많은 이웃이 살아가는 터전이다.
나 혼자만의 행복이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불행과 희생을 강요할 근거는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는 것이다.
올해 마지막 남은 달력장을 바라보며 더 이상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가 나와 우리 이웃을 괴롭히지 앉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삶은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기에도 짧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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