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호대야 문 열어주는 꼬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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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급한 용무가 있을 때 가끔 아이들만 남기고 외출하는 때가 있다.
위험한 장난을 하지 말고 집을 잘 볼 것을 당부하고 나가지만 걱정이 되어 밖에서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 걱정 마세요. 우리가 암호를 정했으니까, 암호? 하고 물으면 가제미하고 대답하셔요. 엄마 말곤 아무도 문 안 열어 줄 테니까요.』
웃어 버릴 수 없는 일,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고 집을 철저히 잘 보기 위해 세 아이가 짜낸 묘안이었던 것이다.
『암호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엄마 목소리도 모르니?』
나는 부랴부랴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갔다.
『딩동 ! 』
『누구세요?』
『엄마다!』
『암호를 대셔요.』
『엄마라니까.』
『암호를 모르세요?』
아무리 엄마라고 애원을 해도 끈질기게 암호를 대라니 하는 수 없이 『가제미!』라고 대답했다. 그때서야 안심한듯 문을 열어주곤 싱긋 웃었다.
나는 어렵게 현관을 통과하여 거실에 들어섰다. 이게 웬일인가? 거실 가운데에는 야구방망이를 비롯하여 서너 개의 크고 작은 몽둥이가 버티고 있었다.
『이건 뭣하러 갖다 놓았니?』
『강도가 올까봐 우리가 준비해 놓은거예요.』
딱한 아이들, 불법침입자를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있었던 것이다. 아이들도 불안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땐 엄마가 외출하시면 열어 젖힌 대문 밖에서 동무들과 오손도손 소꿉놀이를 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는 집 잘 보기를 당부하시지도 않고 다치지 말고 잘 놀기만을 바랐었다. 그러나 지금은 눈을 뜨고 나면 세상소리가 그러하니 어린것들에게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대처해 나가도록 주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자연히 아이들은 우리집이라는 둥지 밖의 사회를, 낯선 사람을 경계하게 되었다.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내용들은 시험답안을 쓸 때나 적용되는 예도 적지 않게 되었고, 내 집 찾아오는 손님도 잘 가려서 대해야 하는 눈치 빠르고 차가운 아이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같은 동에 사는 K집에 볼일이 있어서 찾아갔다. 그 집 아이들은 나를 잘 알고 있으련만 안전 쇠사슬을 문에 걸친 채 작은 문틈 사이로 『엄마 안 계셔요.』하였다. 우리 아이들도 분명 그렇게 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불쾌해짐은 어쩌랴.
불신으로 대하고 불신을 당하는 일에 익숙하지 못함을 탓해야할까? 잠싯동안 우리 아이들 마음을 든든하게 해준 몽둥이들을 모아서 베란다 한구석에 세워놓았다. 『애들아, 이제 도둑도 강도도 없는 나라가 될 거란다. 이런건 다 필요가 없는….』 이런 이야기를 마음놓고 할 수 있는 날은 없을까 생각해 본다. <서울 강남구 반포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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