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좋은 남자의 나쁜 행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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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형경
소설가

한 심리학자가 공중화장실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읽었다. 그는 칸막이 너머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가 짜증 낼 이유가 없잖아. 여러 사람 앞에서 왜 그렇게 행동하니? 지금은 그냥 넘어가지만 조금 더 크면 회초리 감이야.” 심리학자는 몰래 칸막이 틈으로 건너다봤는데, 젊은 아빠는 4개월도 안 돼 보이는 아기에게 꾸지람을 하고 있었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웩슬러는 그런 사례를 예시하면서 ‘좋은 남자의 나쁜 행동’이라는 명제를 제안한다. 그 젊은 아빠는 아기를 사랑하고 직접 돌보는 좋은 아빠지만 그가 하는 행동은 아기 입장에 대한 공감 없는 나쁜 행동이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기를 향해 자기의 불평불만을 쏟아내면서 아기의 미래까지 위협하는 행동인 셈이다. 웩슬러는 자신이 아는 많은 아버지가 그와 같다고 밝히고 있다.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무척 애쓰지만 아들 입장에서는 수치심이 느껴지는 나쁜 행동을 한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나쁜 경험이 무의식에 깃들어 있어 그렇다.

 외국 심리학 책에서는 아버지에게 상처 입는 남자들의 토로를 자주 만난다. 식탁 위에서 아버지가 받아주기를 기대하며 뛰어내렸는데, 아버지가 몸을 피하는 바람에 머리를 방바닥에 찍은 사례가 있었다. 그 아버지는 머리에서 피 흘리는 여섯 살짜리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네게 기대하는 것처럼 온정적이지 않아.” 프로 테니스선수인 아버지는 아들의 실력을 키워 준다는 명목으로 아들과 테니스를 치며 늘 아들을 이겼다. 아들의 실력을 비판하고 조롱하기도 했다. 열심히 노력한 아들이 마침내 아버지를 이겼을 때, 그날 이후 아버지는 다시는 아들과 경기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칭찬을 기대했던 아들은 아버지의 태도에서 절망과 죄의식을 느꼈다. 그런 아버지를 경험한 아들은 아버지와는 다른 아버지가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리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왜 자기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학대나 모멸감을 아들에게 건네주는지 알고 싶어 한다.

 10년쯤 전 외국에서 출간된 책들의 사례인데 요즈음 우리 현실과 비슷해 보인다. 아버지 세대에게서 받은 양육이 옳지 않았다고 느끼는 젊은 아빠들이 좋은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아버지 역할을 배우는 등 여러 면에서 애쓰지만 그들 내면의 나쁜 아버지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아들에게 행동화되는 것도 보인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도 내면을 성찰하고 치유하는 일이 먼저인 셈이다.

김형경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