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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영화] 시인 부부로 살며 운명적 사랑에 울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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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일종의 굴레일 수 있다. 무엇보다 일과 사랑의 양립이 힘겹다. 남녀평등이 상식이 된 요즘에도 자녀 양육은 대개 여성의 몫. '실비아'(감독 크리스틴 제프)는 그런 여성의 두 얼굴을 주목한다. 20세기의 걸출한 여류시인인 실비아 플라스(1932~63)의 비극적 삶을 통해 예술과 여성의 함수를 차분히 따지고 있다.

실비아는 남편 테드 휴즈(1930~98)를 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영국 계관시인으로까지 오른 테드는 실비아의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케임브리지대에 유학온 미국 학생 실비아(기네스 펠트로.사진)가 전도유망한 시인인 테드(대니얼 크레이그)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으로 영화는 이후 아내와 시인이란 대척점 사이에서 고민하고, 남편의 자유분방한 사생활에 괴로워하는 한 여인의 우울한 초상화에 집중한다.

뛰어난 남편을 둔 재능있는 아내의 고충이랄까. 조각가 로댕의 명성에 가려 불우하게 살다간 카미유 클로델처럼 실비아는 자기보다 시재(詩材)가 출중한 남편을 뒷받침하느라 자신의 숨은 보석을 드러내지 못한다. 게다가 반복되는 부부갈등과 불쑥불쑥 찾아오는 자살충동. 감수성이 예민한 실비아는 결국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운명적 사랑이 빚은 비극적 종말. 감독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평생 죽음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실비아의 상처받은 영혼을 펼쳐보인다. 기네스 펠트로의 섬세하고, 열정적인 연기도 만족스럽다.

하지만 영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끝난다. 시종일관 사랑을 내세우고, 시인 부부의 줄다리기를 강조하는 까닭에 실비아란 뛰어난 시인을 온전하게 제시하지 못한다. 감성은 살아있되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 평범한 영화랄까. 사랑에만 집착하는 여인이 아닌 세상의 모순과 시대의 한계에 울고 웃는 시인이 증발된 모양새다. 15일 개봉. 15세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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