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35>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돌다리를 건너자마자 초가지붕의 꼴을 벗지 못한 주점과 점포들이 잇따라 나타났다. 대위와 동혁은 비가 와서 더욱 낯설어 뵈는 읍내의 중심가로 들어갔다. 돈지 읍내의 중심가엔 그들이 사볼 엄두도 못 낼 갖가지 상품들을 가득히 벌여놓은 잡화상이 이곳저곳에 보였다. 여러 색깔로 포장된 식료품들, 스웨터, 잠바, 전기용품, 접시, 찻잔…. 동혁은 어느 가게 앞에서 발을 멈췄다.

야, 벌써 나왔구나.

그들은 줄기차게 내리는 비에 홈뻑 젖어 후줄근한 모습으로 유리문 앞에 서 있었다. 창 너머 환한 불빛 아래 가공해놓은 듯한 과일들이 열 지어 놓여 있었다. 물이 흘러내리는 얼룩진 유리를 통해 여러 가지 색깔의 신선한 과일들이 들여다보였다.

봐요, 참외가 나왔단 말이오.

세월 빠르군.

창틈으로 설익은 풋과일의 향기가 스며나와 노역에 찌든 두 사람의 메마른 후각을 건드리는 것만 같았다. 향기는 마치 아득하게 잊었던 날의 기억에 연관되어 그들이 비에 흠씬 젖은 것과 똑같은 만큼 그들을 적셔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귀심(歸心)은 화살과 같다던가. 동혁은 화끈한 감각이 눈시울을 덮는 것을 느끼고, 얼굴을 치켜들어 기분이 나아지기를 기다렸다. 동혁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대위가 말했다.

객지생활 초년이라 그렇소. 하긴, 나두 환절기마다 어쩐지 육실허게 썰렁해지긴 헙디다마는.

그들은 청과상회 앞을 지나쳤다. 이번에는 대위가 동혁의 팔소매를 잡았다. 그는 분홍색의 엷게 비치는 여자 잠옷을 가리켰다.

저 봐! 잠옷 좀 보시오. 기가 막히군. 저걸 감구 잠이 올까 모르겠는데.

비록 초라한 진열장의 옷걸이에 걸려 있었으나 가슴 부근에 수놓인 국화 무늬와 레이스가 달린 잠옷은 금방 날아갈 듯 아름다웠다. 대위는 어깨를 움츠리고 젖은 머리를 부르르 털고 나서 잠옷을 지나쳐 버렸다.

세상에 자기 집이 있는 게 제일 좋은 거야.

그들은 붉은색 외등이 켜진 커다란 한옥의 솟을대문 앞을 지나갔다. 읍내의 유일한 요릿집인 모양인데 재건복을 입은 관리라든가 지방 유지들로 보이는 양복쟁이들이 문 앞에서 배웅나온 작부들과 희롱하고 있었다. 여자들의 풍만한 한복의 고운 색깔과 양산의 요란한 무늬들이 빗줄기 속에 아른거렸다.

'객지'에서의 이 장면은 주변 친구들이 인상적이었다고 하던 부분인데,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영희 교수가 '글쎄 좋기는 한데 노동자가 보는 시선에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잠옷이 눈에 띄는 게 어색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전해들은 소설가 한남철은 픽픽 웃으면서 '그 양반 인생을 사회과학적으로만 보면 안 되지. 남들처럼 가고 싶은 집, 포근한 가정, 기다리는 아내' 따위의 상징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내 생각에는 둘 다 일리가 있어 보였다. 이를테면 '계급적 시선이나 삶의 보편성에 관한 묘사'는 혁명기의 러시아 작가들에게도 논쟁거리였고 나중에 팔십 년대가 오면 거의 일상적 담화거리가 되었다.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