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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19세기 초까지는 ‘금리동결’이 중앙은행의 미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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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호 20면

대금업을 합법화한 교황 레오10세.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서 피렌체의 통치자 ‘위대한 로렌조’의 아들이었다. 그림 왼쪽의 사제는 레오10세의 사촌동생으로 훗날 교황 클레멘테 7세가 됐다. 클레멘테 7세는 영국의 헨리8세와 대립하여 그가 성공회를 조직하는 데 원인을 제공했다.

지난 8월 우리 국민은 즐거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방문과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때문이었다. 교황께서 세파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했다면, 금리인하는 빚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가벼운 지갑을 위로했다. 우연하게도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꺼번에 일어났다. 8월 14일 오전 10시 20분, 거의 같은 시각이었다.

① 금리 조절의 경제철학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는 통상적으로 월 2회 회의를 개최하는데, 그 중 첫 번째 회의에서는 기준금리를 다룬다. 금리 결정은 어느 나라에서나 비중이 큰 뉴스라서 각국 중앙은행들은 회의 개최일자를 미리 밝힌다. 그러나 개최주기와 시간은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경우 처음에는 분기마다 열렸지만 항공기술의 발달과 함께 여행시간이 짧아지면서 1970년대부터 조금씩 늘어났다. 그리고 Fed의 정책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면서 1981년 지금과 같은 연8회 회의 개최 횟수와 시기가 규정으로 확정되었다. 이것이 원조 ‘볼커 룰’이다.

통화정책 방향을 결정할 때 두드리는 한국은행 총재의 의사봉.

금리변경은 80년대에 더 활발
각국 중앙은행들이 정기적으로 회의를 소집해서 금리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이런 관행이 상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980년대까지는 세계적으로 통화주의가 대세라서 각국 중앙은행들은 연간 통화증가율을 정책목표로 삼았다. 연초에 목표치가 발표되지만, 회의가 끝난 뒤 기자간담회가 따로 개최되는 일은 없었다. 이 시기에는 중앙은행은 당연히 말수가 적거나 모호하게 말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됐다.

한국에서는 그런 관행이 외환위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경제지표로서 통화증가율의 의미가 약해지면서 금리중시형 통화정책으로 전환했다. 1965년 국제통화기금(IMF) 차관을 받으면서 시작됐던 통화주의가 1997년 또 다른 IMF 차관을 받으면서 폐기된 것이다.

그렇다고 금리가 더 자주 변경된 것은 아니었다. 금통위에서 금리변경을 의결한 기록을 보면, 50~60년대 연평균 5.1회, 70~80년대 6.6회, 90년대 2.1회, 그리고 2000년대 이후로는 2.3회다. 이쯤 되면 금리변경의 전성시대는 70~80년대였다고 할 수 있다. 1년에 두 번 정도 금리가 조절되는 요즘에는 나머지 열 달 동안 ‘금리동결’을 계속 뉴스로 다루는 게 이상할 정도다.

통화주의 시절에 금리조절이 더 빈번했던 것은 역설이다. 이는 정부와 한국은행이 금융기관들의 여수신금리를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책당국은 모든 금리를 일률적으로 통제하는 가운데 금융기관들의 여수신 활동을 만기친람(萬機親覽)하고 상황에 맞추어 금리수준을 미조정했다.

외환위기 이전의 은행권 금리는 금통위가 의결했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역할이 컸다. 금통위 의장을 재무부장관이 맡았을 뿐만 아니라 정부는 제2금융권 즉, 비은행권 여수신 금리체계까지 조절하는 권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은행 수신의 증가로 통화증가율이 높아지면 물가상승 압력이 커진다는 이유로 정부는 늘 제2금융권에 유리하도록 금리를 조절했다. 은행들이 아우성을 치면 금리격차를 약간 조절하는 정도였다. 따라서 1997년 이전 금리조절을 둘러싼 정부와 중앙은행의 긴장은 ‘테일러 룰’과 같은 이론논쟁이 아니라 제2금융권과 은행권 간 대리전에 가까웠다.

나폴레옹, “금리 선진국 수준으로 낮추라”
정부가 금리문제에 간여하여 중앙은행과 긴장을 빚는 경우는 외국에서도 드문 일이 아니다. 1800년 프랑스은행을 설립할 때 나폴레옹이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다. 대출금리를 연6%로 유지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의 금리수준은 연6%, 프랑스는 연7%였기 때문에 프랑스 경제가 성장하기 어렵고 서민의 삶도 고달프다고 판단한 것이다. “금리를 선진국 수준으로 과감하게 낮추라”는 나폴레옹의 요구는 오늘날에도 별로 낯설지 않다.

19세기의 나폴레옹이 노골적으로 금리인하를 ‘지시’했다면, 20세기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은근하게 ‘압력’을 주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백악관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Fed는 1965년 금리를 인상했다. 그러자 존슨 대통령은 텍사스에 있는 개인목장으로 윌리엄 마틴 Fed의장을 초대했다. 대통령이 마틴 의장을 차에 태우고 손수 운전을 했는데,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험하게 달리는 바람에 마틴 의장은 혼비백산했다. 머리칼이 엉클어진 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에서 내리는 그의 모습은 ‘텍사스식 환영’이라는 이름으로 보도됐다. 대통령 면담 뒤 마틴 의장은 차분한 어조로 “경제상황에 관한 인식을 공유했을 뿐 금리는 논의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존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 때문에 “재정여력이 충분치 않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통치자와 정부가 보기에는, 선거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금리 문제를 중앙은행에 일임하는 것이 미덥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좀 더 긴 안목에서 보자면, 금리수준을 인간이 결정하는 것 자체가 불순한 생각이거나 이상한 시도일 수 있다. 인간의 역사에서 필요에 따라 금리를 조절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게 된 것은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금전거래를 통해 이자를 주고받는 행위 자체가 자연의 섭리에 거슬리는 일이라고 주장했다(화폐불임설). 이 주장은 기독교사상과 어우러져 중세시대를 지배했으며, 이슬람 사회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슬람금융에서는 이자가 허용되지 않는다. 이슬람 세계가 초대교회의 정신을 잘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기독교 세계에서도 처음에는 성경의 말씀을 좇아서 이자수취를 금지했다. 교황과 추기경들이 모이는 공의회에서는 대금업을 금지하는 결정을 수없이 내렸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 이후 상거래가 활발해지고 종교개혁 움직임이 나타나면서 금리와 대금업을 좀 더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독일의 에크라는 신학자가 『계약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통해서 “연5%의 금리는 하나님께서 용서할 수 있는 합리적인 상한선”이라는 신학이론을 발표했다. 그러자 교황청이 응수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10세가 1515년 발표한 『피에타법』 즉, 가난한 사람을 위한 대부업법은 서양역사에서 금융업을 합법화한 사건이었다(금리에 관한 모든 결정에서는 항상 서민과 민생이 구실이 된다). 신성모독에 해당되지 않는 금리상한선은 연5%였다.

그린스펀 시대부터 금리정책 활발
이 때까지만 해도 금리는 신의 영역이고, 교황이 결정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헨리 8세는 거기에 맞서서 금리문제를 세속의 세계로 끌어내렸다. 그는 1545년 대금업금지법을 제정하고 연10%를 상한선으로 정했다. 그러나 그 결정은 너무 파격적이라서 그의 사망 이후 근 200년 동안 금리상한선이 폐지와 부활을 거듭했다. 1713년 마침내 교황청의 허용수준인 연5%로 돌아왔지만, 금리는 어느덧 교회가 아닌 의회가 결정하는 것으로 굳어져 버렸다.

금융업이 합법화된 이후에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금리수준 조절에 무척 소극적이었다. 금리 조절을 신성모독으로 취급해 왔던 관습 때문이었다. 영란은행은 1746년부터 1822년까지 76년간 네 명의 총재가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금리를 조절하지 않을 정도였다. 프랑스은행도 1820년부터 1847년까지 27여 년간 금리를 동결했다.

19세기 초까지는 ‘금리동결’이 중앙은행의 미덕이었다. 중앙은행들이 대출량을 조절하고 싶을 때는 금리변경 대신 어음의 만기나 대출업종을 조절했다. 오늘날에는 이런 것을 신용정책이라고 부른다. 신용정책은 제2차 세계대전까지도 금리정책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용되다가 전후 점차 축소됐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Fed의 앨런 그린스펀 의장의 시대가 열리면서 금리정책에 밀려 소멸하다시피 했다. 그러다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다시 부활하는 듯한 낌새가 보이고 있다.

금융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지난 8월 14일 오전 10시 20분 한국은행의 금리인하 결정은 마침 그 순간 한국을 방문한 교황의 권한에 속하던 일이었다. 외국에서는 한때 황제나 대통령이 직간접적으로 간여했던 문제이기도 하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라는 개념이 보급되면서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중앙은행이 금리를 변경할 때는 여전히 좌고우면해야 한다. 의사에게는 환자의 목숨을 연장할 의무만 주고 단축할 권한이 허용되지 않듯이 중앙은행은 가급적 금리를 낮게 유지해야 한다는, 나폴레옹 식 견해가 여전히 강한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노심초사해 가며 금리를 조절해 나가는 조직과 사람들은 누구인가?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그들에 관한 역사다.



차현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올해로 30년째 한국은행에서 근무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없는 경제학』, 『금융오디세이』 등 금융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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