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칼럼] 지놈 시대 새 윤리학 절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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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과학전문지 '네이처'는 지난 14일 발표된 인간유전체 지도의 완성을 나폴레옹이 '로제타 스톤'을 발견한 것에 비유했다.

로제타 스톤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새겨진 비석으로, 그 문자를 해석해냄으로써 이집트 문명에 대한 이해가 가능했듯이 이제 유전체 지도를 해석하는 지난한 작업이 남아 있다고 한다.

여하튼 인간유전체 지도는 생명의 신비를 밝히는 데 필수적인 길잡이가 될 것이고, 이제 생명공학의 성과가 우리의 삶에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오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 프로젝트를 주도한 미국에서는 인간 유전정보의 해독과 활용이 개인과 가족,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1990년 프로젝트의 출범과 동시에 그 윤리적.법적.사회적 영향을 탐구하는 프로그램(ELSI)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990년부터 99년까지 10년간 미국 국립보건원은 연구비 총액의 5%인 5천8백만 달러, 에너지부는 3%인 1천8백20만 달러를 ELSI 연구에 할애했다.

이후 캐나다와 유럽 각국에서도 유사한 프로그램들이 속속 도입됐다. 인간유전체 연구에서 ELSI 연구가 얼마나 신속하게 당연한 규범으로 받아들여졌는가는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인간유전체 연구가 초래할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체계적 대응 방안을 강구한다는 당초의 포부는 아직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제기되는 이슈가 종래의 패러다임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새롭고 복잡한 문제들인 데다, 유전체 연구가 급속히 발전함에 따라 새로운 이슈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개인의 유전자 정보가 유출된다면 어찌되겠는가. 그 개인뿐 아니라 가족.친척.자손의 생물학적 단점이 다른 사람에게 낱낱이 공개된다. 주민등록번호의 유출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문제다.

한국은 2001년부터 과학기술부와 보건복지부의 연구사업에서 일부 소규모의 ELSI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연구와 임상 활동에 수반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처하는 인프라를 축적한 선진국들에 비해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의 ELSI 분야에는 훨씬 더 광범위하고 도전적인 과제들이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 생명의 신비가 풀리면서 우리가 누리게 될 혜택과 함께 수반되는 사회적 혼란과 위험성, 그리고 그 대처방안을 탐구하는 데 다양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전문가와 시민, 그리고 생명과학 및 보건의료 전문가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윤정로 KAIST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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