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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5)제75화 패션 50년(26)-세미 스타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이렇듯 우리네 실정에 걸맞지 않게 들뜬 의생활을 바로 잡으려는 신생활복운동은 의상 디자인 자체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치마통이 너무 좁아 활동이 불편한 타이트 스커트나, 페티코트를 받쳐 입는등 너무 넓은 치마폭이 거추장스런 플레어 스커트 대신 양쪽의 결점을 적당히 보완한 새 디자인이 등장했다.
즉 세미타이트라고 불린 유행으로 스커트의 허리부분에 양쪽으로 한두개의 주름을 잡아 입기 편하게한 것이었다.
이에 맞춰 상의는 허리선을 나타내지않는 박스형, 소매는 그 때까지 유행하던 끝이 넓은 7푼소매가 차츰 퇴조하고 점차 좁고 긴모양으로 원상복구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활동하기 편하게 알맞은 넓이의 스커트란 의미에서 시작된 세미란 외래어는 1960년대 초반의 우리네 패션계에서 유행어처럼 아주 널리 쓰였다.
양장점에서 디자이너와 고객 사이에 빈번히 오간 말도 이 세미란 단어로서 「세미로 해드릴까요?」 혹은 「세미로 해주세요」하면 구태여 긴 설명 붙이지 않아도 치마길이건 바지통이건 「유난스럽지않게」「남들처럼」「보통으로」「적당히」하는 여러가지 의미가 복합되어 통했다.
양장점 못지 않게 세미란 말이 애용된 곳은 양화점-. 당시까지만해도 여성용 구두하면 학생화처럼 뒷굽이 납작하거나 반대로 뒷굽이 아주 높은 하이힐의 두종류뿐 굽높이에 다양성이 없었는데 세미 타이트 스커트출현에 맞춰 단화와 하이힐의 중간 높이인 미들굽이 처음 선을 보였다. 이것이 속칭 세미힐로 불리면서 여학생에서 중년층에 이르기까지 널리 신겨졌다.
여담이지만 세미힐로 불린 중간굽의 대유행을 제일 기뻐한 사람들은 아마도 양화점 주인보다 오히려 도로관리를 담당한 분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갓 포장해놓은 아스팔트 길위를 뒷급이 뾰족한 하이힐을 신은 여인들이 통과하면 금방 구멈이 폭폭 패어 애써 다져놓은 보람도 없이 볼품없게 돼버리는 난처한 사태가 적어졌을테니 말이다.
그무렵 구두의 유행으로는 중간굽의 출현도 출현이지만 이탈리언컷 스타일이라고 해서 그때까지 뾰족하던 구두의 앞부리를 1cm정도칼로 톡 쳐낸듯 날카롭게 모진 새모드가 외신뉴스를 타고 전해졌다.
그때까지 구두 앞부리라면 찌를듯 뾰족한 것이 가장 모던하다고 여겨오던 풍토에서 이 이탈리언 컷스타일은 처음 뭔가 장난같고 우스꽝스런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역시 새유행의 세력은 도도해서 로마에서 시작된 이 뉴스타일의 외신뉴스가 전해진지 1년도채 못돼 서울거리를 거니는 여성들의 발에는 너나 할것없이 앞부리가 잘려나간듯한 새구두가 신겨졌다.
참신한 기풍을 강조하는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1960년대초반에 사회를 풍미한 노래에 『노란샤쓰의 사나이』가 있다.
한명숙이란 무명가수를 일약 스타로 만든 이 노래는 건전을 표방하던 당시의 사회풍조를 잘 반영한 것으로 이 노래의 히트와 함께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는 갑자기 노란 셔츠가 대유행을 이뤘다.
그래서 노란셔츠는 곧 믿음직스럽고 남자다운 남성의 대명사처럼 쓰여질 지경이었다.
62년9월 「샹송의 밤」공연차 우리나라에 온 「이베트·지로」가 이 노래를 우리말로 부름으로써 노란셔츠는 또한번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때 「지르」를 초청했던 주최측의 부탁을 받고 나는 양단으로 치마·저고리를 한별 만들어 그녀에게 선물했다. 「지로」가 바로 이한복을 입고 『노란샤쓰의 사나이』를 불렀기 때문에 내게는 이노래가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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