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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응부-김문기 사육신논쟁…양쪽 논거를 보면|「불복」해석 어떻게 해야하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유응부냐? 김문기냐?』 마침내 국회청원전으로까지 비화된 「사육거논쟁」이 처음으로 국사학계에 비상한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지난 77년7월. 사육신 순절5백21주기를 전후한 당시, 전기작가이며 방송극작가인 기석봉씨는 사육신의 여섯사람-성삼문·박팽연·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가운데서 유응부 대신 김문기를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지금껏 전해내려온 사육신 명단은 남효온(단종2년1454∼성종23년1492)이 지은 시문집 『추강집』제8권「사육전」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의 「육신전」은 항간에 구전되어온 항설을 근거로 기록됐기 때문에 김문기대신 윤응부로 잘못 기술했고 이를 후세에까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와전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육신전」에서 남효온은 유응부를 가리켜 『몸은 재상으로 있으면서 거적자리로 방을 가리고 살았다』느니, 『일찌기 함길도절제사로 있을때 오랑캐를 진압한 시를 지었다』느니, 『가죽과뼈가 다 타들어가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불복) 죽었다』는 등의 찬사를 아끼지않았는데 「재상」과 「함길도절제사」를 역임한 「불복」의 충신은 유응부가 아니라 바로 당시 공조판서와 도진무의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단종 복위운동을 주도한 김문기라는 것이다.
김문기가 바로 재상과 함길도절제사를 지낸 인물이며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유독 그만이 굴하지않고(불복) 충신의 절의를 나타냈다고 정사인 『세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구씨는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바로 국사학계 일부의 지지를 받으면서 김영금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김문기를 유응부대신 사육신 명단에 넣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대두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77년9월22일 특별위원회를 열고 『백촌 김문기를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현창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의하여 이를 문교부에 통보했다.
또 5백여년동안 사육신으로 현창되어온 유응부를 제외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므로 그대로 두되 앞으로는 「사육신」이란 명칭대신 「단종충신」이란 용어를 사용키로했다.
이러한 유권적 결정이 있자 학계일부에서는 찬·반양론으로 갈려 열띤 공방전을 시작했다.
당시 김성균교수(전국사편찬위원장·경희대)는 『복위사건에 해를 입은 사람은 많았으나 충의의 예칭을 받은 사람은 육신뿐』이라면서 『이러한 예칭은 무슨 제도적 절차를 밟아서 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여론과 공론, 국민적 감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조하고 『단지 판서라는 고관과 도진무라는 실권을 내세워 주도적 지위를 반증하여 김문기를 육신속에 넣는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창수교수(동국대)는 『야사에 비중을 두는 것은 무리』라면서 명백한 오류는 바로 잡아야한다고 논박했다.
한편 79년1월 이극호교수(부산대)는 『사육신정정론의 허점』이란 논문을 통해 『과거수백년간 수십번의 논변과정을 통해 숙종·정조연대에 확정된 사육신에 대한 결정을 놓고 몇몇 곡학아세하는 이논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결정을 내린 처사』라고 비판하고 『세조실록』에서의 김문기의 「불복」은 모의를 부인하는 태도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현희교수(성신여대)는 김문기의 「불복」은 문초에 대해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는 뜻이지 모의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렇게 정사와 야사, 사료의 고증을 둘러싼 격한 논쟁속에서 이기백교수(서강대)는 『역사학보』(84집) 「한국사학설」에서 학계의 이러한 논쟁은 『자칫 국사학이 지녀야 할 학문적 사명을 망각하고 국사학을 「양반사학」혹은 「문벌사학」으로 타락시킬 우려가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지금 또다시 원점을 맴돌면서 재연하는듯한 사육신논쟁에 대해 뜻있는 학자들은 하루빨리 전근대적인 정신·문화풍토를 지양하고 현대적인 역사의식 위에서 사육신의 해석을 포함한 차원높은 국사교육의 지표가 제시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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