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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NIE] 루터는 왜 교황에 맞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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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 외벽에 대자보 하나가 붙었다. 세계사 변천에 큰 영향을 끼친 글 중 하나인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다. 교황청과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개혁을 주장한 이 대자보가 유럽 전역에 끼친 파장은 엄청났다. 루터의 주장으로부터 시작한 종교 개혁은 부패한 교회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근대 유럽사회에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를 퍼뜨린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종교 개혁은 개신교 탄생으로 이어졌다. 교과서와 언론이 기술한 루터를 통해 근대 유럽사회를 들여다봤다.

마르틴 루터(1483~1546)

16세기 유럽의 종교 개혁을 이끈 선구자. 1483년 독일 작센 주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권유로 한때 법률가를 꿈꿨지만 1507년 사제(司祭)가 됐다. 이후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학 교수로 학생을 지도했다. 1517년 돈을 받고 죄를 면제해주는 면벌부(면죄부) 판매 등 교회의 부패와 왜곡된 구원 사상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다. 교황도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하며, 구원은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6세기 유럽은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이 정치·문화·사회·사상 전반에 걸쳐 지대했다. 루터의 주장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기득권 세력은 그를 탄압했다. 1521년 교황청으로부터 사제직을 박탈당하고 파문 당했을 뿐더러 가톨릭 교회는 그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독일지역을 다스리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도 그를 법에서 추방된 자로 선언했다. 루터는 선제후(選帝侯·중세 독일에서 황제 선출을 위한 투표 자격을 가진 제후) 중 한 명인 프리드리히 집에서 기사로 위장해 숨어지내기도 했다.

 가톨릭 교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종교 개혁은 독일은 물론 영국·프랑스·스위스·네덜란드 등 전 유럽으로 확산됐다. 루터는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1546년 63세의 나이로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교황 지배에 반발하던 제후들을 결속시켰고, 1555년 종교 선택권을 인정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이끌어냈다. 교황 지배에서 벗어난 교회가 최초로 인정받은 합의다. 개신교가 탄생한 것이다.

시대상황

루터가 출판한 독일어 성경

14~16세기 유럽은 중세 봉건 시대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던 혼란기였다. 가톨릭 교회 교리를 중심에 둔 중세 봉건제도가 흔들리고 교회 권위는 쇠퇴했다. 그 이면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섬을 재발견하고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르네상스 운동이 있었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꽃핀 르네상스는 16세기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유럽까지 전파, 전 유럽으로 확대됐다. 르네상스 시기 인문주의자들은 교회의 전통적인 교리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고 자유로운 탐구와 비판 정신으로 자연을 관찰하는 태도를 보였다. 인간을 개성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인간으로서의 삶을 예찬했다. 동시에 가톨릭 교회의 허식과 성직자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처럼 유럽인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신(神)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금성출판사는 “자연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탐구하려는 르네상스 시대의 정신은 근대 과학 기술 발달의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이 르네상스 시기 유럽의 기술 수준을 보여 준다”고 설명했다.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했던 아이슬레벤 성 앤드루 교회

 자연과학의 발달과 나침반, 항해술 등 실용기술의 발전은 신항로 개척 등 해상을 통한 동방무역을 가능하게 했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에 도착(1487)했고 바스쿠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 캘리컷까지 항해에 성공한다(1498). 1492년 콜럼버스가 서인도 제도를 발견하면서 유럽·아프리카·아시아·아메리카를 잇는 세계적 교역망이 형성됐다. 비상교육은 “절대 왕정의 상업 장려와 시민 계급의 성장으로 유럽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주식회사 설립 등을 통해 대자본이 형성되었다…이로 인해 상업 자본가들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였다”고 썼다.

 당시 유럽인의 의식과 시각은 이처럼 크게 달라졌지만 교회는 여전히 부패했다. 세속적 탐욕을 쫓아 제 곳간 불리기에 급급했다. 역대 교황은 거대한 성당과 궁전을 짓고 그 안을 화려한 예술품으로 치장하는 것을 업적으로 삼았다. 네덜란드의 인문학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교황들은 그를 위한답시고 영토와 도시, 공물과 통행세 등으로 세습 재산을 만들어 문자 그대로 하나의 왕국을 세웠다…그들은 이 모든 것을 유지하기 위해 칼과 불로 싸움으로써 기독교인의 피를 강물처럼 흐르도록 만들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세계사 교과서 4종 모두 “북유럽 인문주의자들은 초기 크리스트교 연구를 통해 현실 사회와 교회를 비판하는 등 개혁적 성향을 띠었다”고 기술한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종교 개혁을 이끌다

  당시 독일 지역을 다스리던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필두로 각 제후가 연합한 연방국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교회 지배를 제국 통합의 발판으로 삼는 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다보니 교황청 착취는 날로 심해졌고 각종 세금성 헌금을 상납해야 했던 농노와 시민계급, 제후의 가톨릭 교회에 대한 불만은 누적됐다. 교회의 타락은 극에 달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의 증축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받고 죄를 면제해주는 면벌부(면죄부)를 판매하기도 했다.

 금성출판사·교학사·천재교육은 당시 면벌부를 판매하던 교회를 풍자한 그림을 실으면서 “독일에서의 면벌부 판매가 종교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고 소개한다. 비상교육은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오직 신앙과 신의 은총에 의해 이루어지며, 성경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거라고 주장하면서 교황과 교회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루터의 주장은 인쇄술에 힘입어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루터를 지지한 독일의 제후들은 동맹을 맺고 황제에게 저항하여 마침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에서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고 적었다. 세계사 교과서 4종 모두 루터로부터 종교 개혁이 시작돼 전 유럽으로 확산됐다는 객관적 사실만 짧게 언급하고 있다. 

 루터에 대한 평가는 언론에서 더 구체적이다. “그가 종교개혁의 주요 원리로 제시한 만인사제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고 양심의 자유를 확립함으로써 자유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루터에서 비롯된 이 개인주의는 그 후 자유주의 정치사상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중앙일보 2009년 11월 3일 45면 ‘루터의 면죄부 비판 대자보, 종교개혁 신호탄 되다’) 만인사제주의는 루터의 종교론을 관통하는 핵심 이론이다. 성직자를 통하지 않더라도 신자라면 누구나 성경을 통해 직접 영감을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종교적 학설이다. 교회의 권위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새겨져 있는 비텐베르크 교회 대문

 이를 위해 루터는 당시 라틴어로만 제작됐던 신약성서를 역사상 최초로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했다. 누구나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루터가 출판한 독일어 성서는 현대 표준 독일어로 자리 잡았고, 근대 독일어 발전에 가장 공이 큰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독일인들은 일부 성직자가 독점했던 라틴어에서 해방돼 자유롭게 성서를 읽고 그들의 언어와 이성으로 성서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글자는 무기다…종교 개혁의 불씨를 당긴 마르틴 루터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믿음은 말씀에서 나온다’고 확신했다.” (중앙선데이 2012년 1월 8일 ‘루터가 성경 번역한 공방 한쪽 낡은 책상엔’)

 하지만 그의 주장은 정치적 영역으로까지 확대된 개인주의·자유주의가 아닌 종교적 평등에 국한된 시각이었다. 그 자신은 정작 자유주의라던가 민주주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종교 개혁에 영향을 받아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며 벌어졌던 독일 농민전쟁(1524)에 대해선 오히려 그의 정치적 지지자였던 제후들 편에 서서 보수적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루터는 제후들에게 농민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사회적 불평등은 필요하다고 믿었고 농노제 폐지는 도둑질을 부채질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그의 주장이 결과적으로 개인주의의 성장과 확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글=정현진 기자 자문=중동고 김경철 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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