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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의 음악 읽기] 신비스럽다는 알캉, 듣다 보면 유쾌·친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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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호 27면

뭔가 창조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시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었으리라. 하지만 반향 없는 창조 혹은 창작은 허무하고 외로웠다. 쓸모없는 밤샘의 긴 시간 동안 마치 깨달음처럼 어떤 종착지에 도달하고는 한다.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냐!’ 그랬다. 하지 않으면 ‘하는’ 고통이 없다. 흡사 대단한 발견인 양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자리를 터는 순간 마음의 다른 쪽에서 새로운 파도가 밀려오고는 한다. 무상감 혹은 무력감. 시작(詩作)은 내게서 그렇게 점차 멀어져 갔다.

샤를 발랑텡 알캉의 피아노곡

하지 않아 편안해진 순간을 대체하는 것으로 종종 발견의 기쁨이 찾아오고는 한다. 창조의 다른 켠에 발견이 있었다. 이용한이 집념으로 묘사하는 길고양이들의 생활사가 그랬고,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미학이 그런 기쁨을 안겨줬다.

최근 몇 년 새 가장 큰 발견의 기쁨이라면 여수시의 발견이다. 작년에 세 차례나 그곳 돌산공원 아랫동네를 찾아가 하릴없이 거닐곤 했다. 저축이 좀 더 쌓이면 돌산마을에 작은 집을 장만하고 아예 이주를 하리라. 동행한 아내가 더 적극적이다. 한데 발견의 스케일이 자꾸 커진다. 이번 추석을 도모해 5일간 다녀온 일본 홋카이도 의 하코다테는 여수시 찜 쪄 먹는 아니, 세월의 축적으로는 더 깊은 감흥을 안겨주는 아름다운 바닷가 동네였다. 여수, 하코다테, 참 좋더라. 아, 나에게는 갈 곳이 있다.

쇼팽, 리스트를 ‘발견’했다는 사람은 없다. 발견되기에는 너무 익숙하고 유명한 기성품이 그들의 피아노곡들인 것. 그런데 그들 사이에, 그러니까 쇼팽과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리스트와 유사한 대중적 인기를 누렸으며 작품 난이도에서는 이른바 ‘더 어렵더라’는 세평을 받았던 작곡가가 있다. 샤를 발랑텡 알캉. 그가 발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로지 덜 유명하다는 사실 때문인데 대체 이게 뭔 사태란 말인가. 어째서 그가 묻혀 버린거야, 하는 놀라움이 곡을 들을 때마다 터져 나온다.

알캉에 대한 최초의 호기심은 ‘이웃 마을의 화재(火災)’라는 피아노곡 때문이었다. 1970년대에 피아니스트 로널드 스미스는 음악사에서 거의 실종되다시피한 알캉의 작품 다수를 레코딩한다. 그중 알캉의 대표곡이라고 할만한 ‘단조에 의한 12개의 연습곡 op.39’(흔히 마이너 에튀드라고 부른다), ‘장조에 의한 12개의 연습곡 op.35'(메이저 에튀드)가 있다. 이웃 마을에 불났다고 외치는 곡은 메이저 에튀드 제 7번 곡으로 유튜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알캉의 초상화(1835년). [Dubufe]

‘화재(火災)’곡은 화재는커녕 하염없이 평화로운 마을 정경으로 시작된다. 잠시 후 불길한 저음부가 둥당거리고 이어 경고소리, 우르르 도망, 난리법석, 그리고 조용한 진화와 수습까지. 그러니까 어린애도 파악할 수 있는 서사구조인데 마치 한편의 옛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다. 유튜브에서는 손열음의 라이브 연주로 마이너 에튀드 제 12번 ‘이솝의 향연’도 찾을 수 있고, 잭 기본스가 해설과 연주를 이어가는 솔로 피아노 콘체르토 같은 대형 작품도 떠다닌다. 물론 알캉의 고수로 꼽히는 아믈랭 연주버전도 꽤 찾을 수 있다.

자, 잠시 짬을 내 디지털 바다에서 알캉 연주 여럿을 찾아들어봤다고 하자. 어떤 감흥이 들까. 감히 장담할 수 있다. ‘어, 재밌네?, 쉽네?, 즐겁네?’ 이쯤 아닐까. 소문 속의 알캉은 신비의 프랑스 작곡가다. 생전에 리스트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활약했고 친분도 깊었으나 그의 천재성 때문에 리스트 스스로는 꽤 경계를 했다고 전해진다. 1888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피아노의 베를리오즈’라는 평가가 따랐는데 꽤 긴 기간 대중 앞에서 사라진 세월 때문에 어떤 신비감을 안겨 주었던 것 같다. (추측건대 인기를 잃자 피아노 교습 따위로 조용히 살지 않았을까?)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19세기 들어 작곡가 대신 최초로 대연주가의 시대가 도래했고 그 선도자가 쇼팽, 리스트였다. 당시 이들과 동열 동급의 음악가 알캉이 있었는데 어찌된 연유인지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그 망각이 신화를 낳았다. 엄청난 기교파이며 어렵고 난해하다, 유태인이라 인생고가 심했고 좀 괴이한 삶을 살았다더라... 등등.

하지만 내가 직접 경험한 알캉의 발견과정은 소문과 꽤 다른 결론을 낳았다. 어렵거나 난해하기는커녕 당시로서는 유례없을 만큼 대중친화적인 작품이 알캉의 곡이었다. 100여 곡에 이르는 작품을 다 섭렵하지는 못했지만 한마디로 가벼운 문학작품 같은 즐거움의 피아니즘이 알캉 음악의 요체였다. 앞서 언급한 대표곡에 이어 피아노 솔로를 위한 심포니, 세 개의 작은 판타지, 알레그로 바르바로, 미친 여인을 위한 노래 등등을 들어보자. 이건 피아노와 더불어 놀자는 음악이다. 도대체 어디에 난해가 있는 걸까.

창조의 고통을 포기하고 발견의 즐거움으로 이동했을 때, 그 대상이 음악일 때 알캉은 유쾌한 반려가 될 것이다. 그런 소설, 영화도 참 많다. 무명에서 보석 찾기. 당분간 그렇게 놀아봐야겠다.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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