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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 투 성이…「보살의 죽음」|수사공전 10흘 째…유 노파 피살사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서울 원효로 여 갑부 윤경화씨(71)가 피살 된지 13일로 열흘째-. 범인은 과연 누구인가. 수사는 계속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경찰은 그 동안 죽은 윤씨의 인척이 되는 K모 여인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며칠간을 주야로 조사했으나 횡설수설하는 「자백」만 받아 냈을 뿐, 이를 뒷받침 할 만한 물증을 찾지 못해『자칫 미궁의 늪에 빠질 우려마저 있다』고 초조한 빚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제까지 용의선상에 오른 숫자만도 20여명으로 이들 중 상당수가 인척 또는 측근들.
1차로 경찰수사를 받은 사람은 영화『오! 인천』의 제작과 관련된 P모씨.
윤씨가 이 영화에 제작비를 투자했다는 가족들의 말에 따라 이 영화의 한국흥행권을 둘러싼 범행가능성을 수사했으나 이제까지 조사결과 투자한 사실이 밝혀지지 않은데다 알리바이 등 이 성립되었고, 윤씨의 일당 고용운전사 L모씨, 친척 C모씨 등도 모두 혐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이후 경찰이 윤씨의 가족주변을 집중 조사하는 이유는 윤씨가 생전에 재산문제 때문에 가족 내 불화로 적지 않게 고통을 겪었다는 주변 이야기 때문이다.
가장 두드러졌던 가족 내 불화는 지난 65년 조카며느리 P모씨(사망)가 윤씨의 음식에 독약을 탔다가 미수에 그쳤던 독살미수사건. 당시 재산문제로 의견충돌 끝에 범행했던 P씨는 경찰에 구속돼 10여 년간 옥살이를 했다.
윤씨는 또 고향 전남 순천에 시가 6천만원의 집을 사서 조카사위 K모씨(80년 사망)에게 관리를 맡겼다가 K씨가 허락 없이 방을 전세 주고받은 전세금을 유용했다 하여 가옥명도 소송을 내는 등 불화가 계속됐었다.
특히 최근 윤씨가 많은 재산을 종교계에 헌납하려 하는 등「외부」에는「큰손」을 쓰면서도 친척들에게는 인색해 재산문제를 둘러싸고 가족내의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찰이 K모씨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몰아 붙이고 있는 것도 재산문제로 불만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
집중적인 철야심문 끝에 K씨가 10일부터『내가 범행했다』『남편이 했다』『동생이 했다』는 등 횡설수설하자 경찰은『드디어 자백하기 시작했다』고 흥분, 11일부터는『곧 전모가 밝혀질 것』이라고 희색이 만면했었다.
그러나 K씨의 진술에 따라 정릉 집 주변을 금속탐지기로 샅샅이 뒤지고 최근 공사를 새로 했다는 안마당시멘트바닥까지 파헤쳐 보았으나 범행 때 피가 묻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옷가지, 범행현장에서 없어진 것으로 보는 저금통장, 윤씨 집 현관문열쇠 등「자백」을 뒷받침 할 증거가 나타나지 않자 경찰은 다시 초조한 빚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에 있어 법인의 정체에 못지 않게 궁금증을 던져 주는 것은 윤씨의 신상명세.
빈농의 딸이라는 설과 구한말 종5품 벼슬을 지낸 아버지와 상궁출신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고명딸이라는 설이 엇갈리는가 하면, 또 어린 나이에 절에 행자로 들어가 불도를 가까이 했다느니, 12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의 사찰에서 불도수업을 하다 해방 후 귀국했다는 등으로 내력도 구구하다.
오래 전부터 윤씨의 재산관리상의 법률문제를 상담해 온 김형준 변호사(54)와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도 재산처리에 관한 법적 근거가 될 유언장 등을 남겨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경우 법정상속이 불가피하고 민법규정상 첫 번째 상속순위인 직계비속과 두 번째 순위인 직계존속, 그리고 세 번째 순위가 되는 형제자매는 윤씨의 경우 모두 사망해 해당자가 없다.
따라서 윤씨의 재산을 상속받게 되는 것은 네 번째 순위인「8촌 이내의 방계혈족」에 해당되는 윤영배씨(48)등 조카 3명과 4명의 질녀 등 모두9명.
윤씨는 이들 대부분에게 학비를 주었고 일부는 외국유학까지 마치게 했으나 상속권을 가진 이들 조카 등 이 윤씨로부터 혜택을 받고도 대부분 윤씨에게는 불만이 많았다는 것이 가족들의 설명이다.
고희기념은 한 할머니의 죽음을 둘러싸고 뒷 얘기가 이처럼 분분한 사건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에 못지 않게 경찰의 마구잡이 수사로 피해자의 인척과 측근이 이렇게 무더기로 곤욕을 치르는 예도 드물다는 것이 사건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얘기다. 경찰이 용의자로 내 새우는 K모 여인도 아무런 객관적 증거가 없는 데도 경찰의 심증하나로만 지금까지 이 호텔, 저 호텔로 끌려 다니면서 밤잠을 자지 못하고 자백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이다.

<진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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