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포기한 휴가 귀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내고향은 무주구천동이다.
덕유산 계곡을 타고 울창한 숲 사이로 십리길을 흐른다는 차디찬 물살. 발을 담그면 오금이 저린다. 한 여름날의 하학길. 계곡의 찬물에 멱을 감으며 바위를 일구어 가재를 잡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모르다가 해거름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가 엄마에게 꾸중을 듣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는 관광의 명소로 변해 호텔과 풀장이 들어서고 계곡다운 기품과 정취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만 유년기의 추억이 서린 꿈의 계곡이다.
뜻을 품고 상경한지 3년. 해마다 여름이 오면 꿈속에서 고향으로 달리곤 한다.
세차게 바위를 때리는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싱그런 풀 냄새 속에 파묻혀 고향의 품에 안기는 것은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때문에 지난 구정 휴가 때 고향엘 다녀오면서 『비용이 아무리 들더라도 올 여름 휴가는 고향의 계곡에서 보내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매년 여름 그러했듯이 올 여름 또한 그 꿈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
3박4일의 휴가 보너스를 받았다. 월급의 1백%지만 10만원 미만이다.
오랜만에 만져 보는 목돈에 팔딱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지출 명세서를 작성한다.
2개월 동안 밀린 정기 적금 불입액 5만원, 중풍으로 고생하시는 시골 아버지 약값 2만원, 여름 교양 대학 수강료 5천원 등등…. 얄팍한 보너스 봉투를 쪼개며 밤을 새워 궁리해도 휴가비 명목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렇다고 회사에 추가 경정 보너스를 신청할 수도 없는 일.
『아유… 바보야. 그러니깐 휴가비를 대줄 애인을 사귀어야지』「81년 여름 휴가 포기」를 선언하는 내 모습을 보고 같은 방 동료 미숙이가 빈정거렸다.
허영과 사치의 해변에서 「해삼 멍게 말미잘 3총사의 향연」을 즐기기 위해서는 수준급 이상의 디스코 재질도 갖춰야 한다고 했다.
멋과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방갈로 정도에서 잠을 자고 가끔 생맥주 1천cc쯤은 홀짝홀짝 마실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또 알맞게 취기가 오를 때쯤이면 발그레 홍조 띤 얼굴로 배실배실 웃어 주는 교태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래, 『앙큼한 내 친구야』 네 말이 맞아. 그래서 올 여름 휴가를 여름 성경 학교에서 보내기로 했단다』 여름 방학을 맞은 안양천변 동네 꼬마들이 몰려드는 구로동 교회에서 꼬마들의 코도 닦아주고, 노래도 가르쳐 주고 하느님 말씀도 전하면서….
옛날의 안양천은 무주구천동의 계곡처럼 푸른 숲 사이로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흐르는 꿈의 계곡이었다는 사실도 일깨워 주리라.

<문혜자 (22)>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한국 아르오므 주식회사 생산과 근무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