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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부인 사망 뒤 가난한 국수집 딸 점찍은 푸이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만주국 황제 시절 일본을 방문해 총리 관저에서 열린 환영 만찬장에 도착한 푸이. 1945년 4월 8일 도쿄. [사진 김명호]

1957년 2월 8일 오후. 20세 후반의 여인이 푸순(撫順)시의 허베이(河北)구 인민법원 문전을 서성거렸다. 위병소에 근무하던 해방군 전사가 42년 뒤 그에 대한 구술을 남겼다.

“나이를 측정하기 힘들었다. 가끔 하늘을 쳐다보며 뭔가 망설이는 눈치였다. 이혼 수속을 밟으러 왔다기에 제1 합의실로 안내했다. 어깨가 축 늘어지고 발걸음도 무거워 보였다. 리위친(李玉琴·이옥금)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날 따라 법원장이 직접 여인과 마주했다. 평소 하던대로 인적 사항을 물었다.

“이름은?”
“리위친.”
“별명이나 아명이 있으면 말해라.”
“한때 푸웨이칭(溥維淸·부유청)이란 이름을 사용한 적이 있다.”
“연령과 직업은.”
“나이는 28세, 창춘(長春)시 도서관 관원이다.”
“용건은.”
“푸이(溥儀)와 이혼하려 한다.”

익숙한 이름을 들은 법원장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앞에 앉은 여인을 넋나간 사람처럼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복장은 소박했지만 용모가 수려했다. 처음 보는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빤히 쳐다봐도 리위친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남편의 신분을 말하라고 하자 담담히 입을 열었다.

“본명은 아이신줴뤄(愛新覺羅 애신각라) 푸이. 나이는 51세, 만주족이다. 황족 출신으로 청나라 황제와 만주국 황제를 역임했다. 정규교육을 받은 적은 없지만 수준은 10년간 사숙(私塾)을 다닌 사람보다 높다. 외국어 구사능력도 뛰어난 편이다. 수학은 백치에 가깝다. 현재는 전범 관리소에서 개조 교육을 받고 있다. 아직은 미결수라고 들었다.”

법원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결혼을 언제 했는지 물었다. 1943년 3월이라고 하자 그간 이혼을 요구하지 않은 이유를 물었다. 냉정함을 잃지 않던 리위친은 한바탕 훌쩍거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푸이와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이 차이가 많고 자원해서 한 결혼도 아니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 이혼하고 싶다. 그간 남편 때문에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 푸이와 그의 가족들은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남편이 황제 시절에는 감히 생각도 못했고, 지금은 전범관리소에 수감 중이라 이혼얘기를 꺼내기 힘들었다. 희생만 하라고 태어난 인생은 없다. 법원 문 앞에 와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창공을 휘젓는 새를 보고 들어올 결심을 했다. 며칠을 살아도 새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다. 법원이 판단해주기 바란다.”

리위친은 정식으로 소송장을 제출하고 창춘으로 돌아갔다. 법원 측은 인민 배심원을 선정했다. 배심원들은 리위친의 행적을 탐문했다.

푸이는 리위친의 이 사진 밑에 방점을 찍었다.

1942년 여름, 푸이의 세번째 부인인 귀인(貴人) 탄위링(譚玉齡·담옥령)이 세상을 떠났다. 관동군 참모부는 푸이의 일본여인 중에서 새로운 신부감을 물색했다. 사진들을 건네며 선택을 청했다. 푸이는 자신의 사생활이 일본인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다. “탄위링의 시신이 채 식지 않았다. 당분간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푸이의 속내를 읽은 관동군은 중국인 중에서 후보자를 찾았다. 창춘의 난링(南齡)여중 교장에게 예쁜 여학생 사진을 보내라고 지시했다. 일본인 교장은 한 반에서 3명씩 골라 사진관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 여학생들은 사진 찍기를 좋아했다. 이유가 어떻건 무조건 따라 나섰다. 워낙 맛이 없어서 하루에 열 그릇 파는 게 고작인 국수 장수 딸 리위친도 머리를 예쁘게 빗고 사진기 앞에 섰다.

60여장의 사진을 만지작거리던 푸이는 리위친이 맘에 들었다. 유모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천진난만하고, 단순해 보인다. 나는 유치한 애가 좋다. 황후 완룽(婉容 완용)처럼 집안 좋고 똑똑한 여자는 싫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여자가 필요하다.”

몇 주일 후, 두 명의 일본인이 통역을 데리고 리위친의 집에 나타났다. 리위친의 엄마는 남편이 사고라도 친 줄 알고 안절부절했다. 일본인들은 리위친의 엄마부터 안심시켰다. “경사가 났다. 딸을 궁궐로 데려다 공부시키라는 황제폐하의 어명이 내렸다.” 옆에 있던 리위친이 끼어들었다. “학비가 비쌀텐데, 우린 돈이 없어요.” 걱정 말라고 하자 질문을 계속했다. “대학 진학도 가능한가요? 집에서 다닐 수는 없나요?” 일본인들은 뭐든지 가능하다며 리위친의 손을 끌었다.

푸이는 리위친을 복귀인(福貴人)에 봉했다. “앞으로 무슨 불길한 일이 생겨도 문제없다. 네 福자 덕에 화를 면할 수 있을 테니 두고 봐라.”

리위친은 집안이 워낙 가난하다 보니 복귀인 칭호를 받고도 사람 대접을 못 받았다. 푸이도 가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영원히 변할 수 없다며 21개 조항을 제시했다. 두 사람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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