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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드 인터뷰] '거위의 꿈' 현실로… 이정현의 금의환향 스토리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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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현 의원이 인생을 관통하는 신념은 ‘진심이면 통합니다’였다. 그가 펴낸 책이름도 같은 제목이다.

월간중앙전라도 곡성 땅의 두메산골에서 정치인의 꿈을 키우며 바위틈을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를 친구삼아 연설 연습을 하던 13세 소년이 있었다. “마을에 전깃불이 들어오게 해달라”고 연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를 대통령에게 보냈던 이 당찬 소년은 40여 년이 지나 그 대통령의 딸을 대통령으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2년 뒤 청와대를 제 발로 나와 여당 정치인이라면 송곳 하나 꽂을 자리 없는 야당의 절대 아성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선거 기적’을 만들어냈다. 정치권의 풍운아 이정현(56) 새누리당 최고위원의 금의환향 스토리를 직접 들어보았다.

8월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새누리당 대표실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김무성 대표가 이정현 의원이 순천·곡성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면 이정현 최고위원을 업어준다고 한 약속을 지킨다며 이 최고위원을 업어주고 있다.

장면 하나. 지난 8월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 새누리당 대표실. 김무성(63) 대표가 새누리당 최고위원회가 시작되기 직전에 “이정현 최고위원, 이리와~”라며 자신의 옆자리로 불렀다. 그리고는 어리둥절해 하는 이 의원에게 허리를 굽히더니 “업혀!”라고 말했다.

7·30 재보궐 선거 당시 이 의원이 순천·곡성 지역구에서 당선되면 업어주겠다던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이 의원도 내심 바라던 바였다. 이 의원은 주저하지 않고 김 대표의 등에 업힌 뒤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카우보이를 흉내 내듯 왼손을 흔들기도 했다.

김 대표도 힘들어 하는 표정 없이 그를 업고 환한 미소를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당내 주류도, 비주류도, 친박(親朴)계니 비박계니 하는 구분도 사라지고 없었다. 사이 좋은 형과 아우처럼 두 사람이 업히고 업은 채 웃고 있는 모습은 다음날 주요 일간지에 큼지막히 실렸다. 그 사진 하나가 7·30 재보선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새누리당의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옹성 같았던 영호남 지역구도에 큼지막한 구멍을 내고 새정치민주연합의 독무대였던 호남의 정치지형을 순식간에 ‘바꿔’버린 이정현 의원이 정치인생에서 날개를 달았다. 그는 새누리당의 지명직 최고위원이 되었다. 노른자위 상임위로 꼽히는 산업통상자원위원회를 배정받아 “산업단지에 대기업을 유치하겠다”는 약속을 실현할 수 있게 됐다. 새누리당은 “호남에 예산폭탄을 퍼붓겠다”는 그의 공약을 배려해 그를 예산결산위원회에 배정했다. 7·30재보선에서 그가 이뤄낸 선거 기적이 그를 지금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이 의원의 성공은 오랜 인고의 시간이 빚어낸 고진감래(苦盡甘來)였다.

10년 전 720표의 눈물

그의 드라마틱한 성공스토리는 뒤집어보면 실패의 역사다. 수많은 도전과 실패가 있었기에 그의 성공이 더 값진 것이다.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영호남 지역 구도를 타파하기 위한 정치인 이정현의 첫 번째 도전은 19년 전인 1995년에 광주 광산구에서 광주시의원에 출마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당시 평민당의 ‘황색바람’이 더 지금보다 거셀 때 민자당 후보로 출마해 12%를 득표했다.

두 번째 도전은 그가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 광주광역시 서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던 2004년이다. 그는 당시 광주에서 유일한 한나라당 후보였다. 한나라당 당직자로 있다가 사표를 내고 선거전에 뛰어든 그는 선거를 치를 비용이 없어 당 재정국에서 2500만 원을 차용해 광주에 내려갔다. 사실상 퇴직금을 가불한 것이었다.

기자가 당시 그의 용감하지만 ‘무모한’ 도전을 취재하러 광주로 달려갔더니 그는 아침부터 사모관대 차림으로 상가를 누비며 이정현 이름 석자가 쓰여진 명함을 돌리고 있었다. 당시 막 종영한 국민드라마 <대장금>의 연인이었던 동부승지 민정호의 캐릭터를 패러디해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발버둥을 친 것이었다. “왠 사모관대입니까?” 하고 묻자 그는 “아무도 안 쳐다봐서 저 좀 쳐다봐달라고요. 그래도 아주머니들이 쳐다보고 옷고름도 고쳐 매주고 그래요”라며 호탕지게 웃었다.

낙천적인 성격인 그는 애써 여유를 보였다. 당시 천진하기 만 한 그의 두 자녀도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자 지역 방송사들이 이색후보가 등장했다며 구경거리나 되는 듯 카메라에 그의 모습을 담아갔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한나라당의 탄핵 추진이 ‘역풍’으로 바뀌면서 그는 광주 서구에서 겨우 720표(득표율 1.03%)를 받는데 그쳤다. 그로부터 10년,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보란 듯이 새누리당 후보로 나서 순천·곡성 지역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새옹지마(塞翁之馬), 인생역전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지난 7월 30일, 기자는 이정현 의원으로부터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락에 관계없이 인터뷰를 요청해뒀던 터였다. 하지만 그가 거짓말처럼 ‘기적적인 승리’를 이루면서 인터뷰는 무기한 연기됐다. 그의 보좌관이 목이 쉬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며 문자로 보내온 내용은 이랬다. “현장상황이 도저히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당선되더니 사람이 변했네’가 아니라 45일 넘게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땡볕에도 자전거 끌고 다니느라 체력이 완전 고갈되셨습니다. 도저히 힘이 부쳐 인터뷰를 해야 하는데 못해드려 정말 미안하다는 말씀 꼭 전해달라고 하십니다.”

1 유권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2012년 사모관대 복장으로 선거운동에 나선 이정현 의원. 그가 입은 관복처럼 그는 이번 당선으로 금의환향했다. 2 선거운동 기간 동안 이정현 의원은 자전거를 타고 순천시 곳곳을 누비고 다니며 “미치도록 일하고 싶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3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한 이정현(오른쪽에서 두번째)과 형제들. 그는 3남1녀 중 장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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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전4기로 이룬 공든 탑

아닌 게 아니라 그날 순천·곡성발 ‘이정현 쇼크’는 전남 뿐만 아니라 정치권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26년 만에 광주·전남에 새누리당 깃발을 꽂으며 철옹성 같았던 영호남 지역구도를 깨뜨린 그는 뉴스메이커였고, 금의환향한 스타정치인이었다. 그와 약속시간을 정해 서울에서 만나기가 난망해 보였다. 10년 전 그때처럼 그를 만나러 그가 머물고 있는 순천으로 직접 찾아가보기로 했다. 우여곡절을 몇 차례 거치고 난 뒤인 8월 3일 일요일 오후, 기자는 햇볕에 검게 그을린, 상기된 표정의 이 의원과 마주할 수 있었다.

한국정치의 고질병인 영호남 지역구도를 깼다. ‘선거혁명’이라는 표현까지 했는데.

“이제 시작이다. 저 하나 당선된 것만으로는 지역구도가 깨졌다고 볼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 잘못된 지역구도를 깨는 첫 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봐달라. 그동안 호남뿐만 아니라 대구·경북도 일당 독재의 지역구도가 존재해왔다. 누가 먼저 깨느냐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번에 순천시민과 곡성군민이 위대한 결단을 했다. 그러니 이제 시작이다. 제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지 않나.”(웃음)

고향에서 출마하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가졌었나?

“지역에 대한 헌신은 모든 정치인, 모든 국회의원이라면 가지는 기본적인 마음 아닌가! 자기 신념과 목표가 배어있는 고향에서 지역민의 정서를 대변하고 지역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꿈은 오래전부터 가져왔다.”

10여 년 전 그가 기자에게 그의 고향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는 대도시인 광주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도 밤늦게 도착하는 산골, 그나마도 13가구가 떨어져 사는 곡성군 목사동면의 두메산골 마을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정치인의 꿈을 키운 그는 국회의원이 되려면 큰 목소리로 청중을 사로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마을 앞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며 연설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이런 그를 기특하게 생각해 웅변선생님을 집까지 모시고 오기도 했다.

산골소년 이정현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 보내 대번에 학교에서 유명해진다. 그는 편지에 “우리 동네 사람들의 가장 큰 소원은 전기가 들어오는 것”이라는 내용과 함께 동네에서 일어난 재미난 이야기를 미주알고주알 써서 보냈다. 산골소년이 청와대에 편지를 보냈으니 이만저만 큰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교육청에 불려갔다 온 교장선생님은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교육장이 교장선생님에게 ‘뭔가 다른 아이니 잘 키우라’고 했기 때문이다. 교장 선생님의 격려에 자극을 받는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동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85년 당시 민정당 구용상 의원의 비서로 정치권에 입문한다. 이후 여권에서 오랜 당료생활을 거치며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전략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면서도 국회의원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키워갔던 것이다.

영호남의 지역주의에 도전할 생각을 왜 하게 됐나?

“지역주의는 호남만 있는 게 아니라 대구·경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는 호남 출신이고 호남에서 정치하는 사람이니까 다른 지역의 얘기는 놔두고 호남 얘기만 해보겠다. 호남에서 특정 정당이 독식하고 있는데, 어느 정당은 공천만 받으면 되고 어느 정당은 죽어도 안 되는 이런 왜곡된 정치는 독과점이고 어마어마한 부조리다.

이런 사태가 4반세기를 넘어서 고착화되고 있으니 이보다 더한 소모전이 없고, 이보다 더한 지역발전에 걸림돌이 없고 이보다 더한 대한민국 정치발전의 잘못된 구조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누군가는 이것을 깨는 시작을 해야 한다. 그 역할을 제가 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는 1995년부터 일관되게 지역주의에 도전해왔고 세 번 떨어졌지만 또 네 번째 도전을 준비해왔던 것이다.”

‘거위의 꿈’ 휴대폰 통화 연결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성향은 그의 부친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초등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그의 부친 이재주(84) 옹은 어린 이정현에게 실패 대신 실수라는 표현을 써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늘 각인시켰다. 그의 아버지는 “학생이 돈을 알면 큰 꿈을 못 갖는다”며 집안에서 빚 이야기를 할 때는 그를 밖으로 내보낼 정도로 자식교육에 남달랐다. 그래서였을까? 앞서 2004년에 쓰디쓴 실패를 맛봤지만 그는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018 휴대폰의 통화 연결음을 가수 인순이가 부른 ‘거위의 꿈’으로 바꾸고 더 열의를 불태웠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뒤에 홀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날을 위해…”

이 노래 가사처럼 그는 비웃음 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광주 서구을에 다시 출마했다. 공식 선거운동 첫날, 그는 8년 전 그때처럼 붉은색 관복에 사모관대를 한 차림으로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호남 예산 지킴이’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시가지 구석구석을 훑고 돌아다닌 것도 그때부터다. 당시 기자가 방문한 그의 선거사무실은 그를 지지한다는 광주사람들의 발길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광주에서 새누리당 후보자로는 여간해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사람들은 4년 동안 새누리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일하며 호남 예산을 끌어오는데 노력한 것이 지역에 ‘이정현 바람’을 몰고 왔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선거 막판 뒷심이 달렸다. 무려 39.7%를 득표했지만 당시 야권단일후보로 출마한 오병윤 의원(현 통합진보당 원내대표)에게 아깝게 패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순천·곡성 새누리당 공천이 확정된 7월 1일, 그는 ‘거위의 꿈’ 가사처럼 “꿈을 믿는다”고 했다. 여전히 지역장벽을 깨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그리고 7월30일, 마침내 거위의 꿈에 나오는 그 가사처럼 자신의 힘으로 꿈을 실현시키는 저력을 보여주고야 만다.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인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새누리당의 뉴스메이커다. “당청 간 역할을 잘할 만한 이 중 이정현만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새누리당 안팎의 평가다.

“호남사랑, 야당의원 29명에 뒤지지 않아”

이번 선거 결과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저는 이제 정치권과 국민이 두 가지를 답해야 한다고 본다. 우선 정치권이 이번 순천시민과 곡성군민의 어려운 선택에 대해 곡해하지 말고, 비틀지 말고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 이번 선거는 이제 호남 유권자 스스로 ‘우리는 그렇더라도 자식들은 달라진 세상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열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이러한 것이 결실이 맺어져서 그 두꺼운 영호남 지역주의의 장벽이 무너지도록 정치권과 국민이 도와야 한다. 저 역시 지역분할 구도를 깨는 단초를 제공한 사람으로서 지긋지긋하고 절대 후손에게 물려주면 안 될 지역주의를 깨는 일을 적극적으로 확산시켜나가는 일을 하겠다.”

선거 초기에 서울 동작을 출마설이 있었지 않나?

“동작을은 제 입으로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저는 호남출신이다. 처음부터 호남 이외는 갈 곳이 없는 사람이다. 저보고 새누리당 사람이 무엇 때문에 순천·곡성에서 출마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러면 그 사람들(새정치민주연합 후보를 지칭)만 잘났고, 그 사람들만 선(善)이고, 새누리당 사람인 저는 호남에서 출마도 못해야 하나? 그게 말이 되나? 저는 그 사람들과 비교해서 털끝만큼도 호남 사랑이 뒤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왜 출마를 못한다는 말인가? 저는 호남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도 그 사람들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는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정현은 호남에서는 당선되면 안 되고, 민주당은 무조건 호남에서 돼야 하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구조를 저는 반드시 깨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의 당선은 지역발전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고, 대한민국 정치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다.”

그의 목소리 톤이 두 옥타브 올라갔다. 그의 당선으로 새누리당은 ‘세월호 정국’을 벗어나 기사회생했고, 호남의 여당인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는 한순간에 궤멸됐다.

그는 도대체 어떻게 당선이라는 정치적 기적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기자와 만난 순천시민들은 그의 부지런함과 진정성을 꼽았다. 그는 순천시의 후보자 사무실 벽에 자신의 이름과 ‘미치도록 일하고 싶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리고는 동네 가게에서 점퍼를 사고, 주름이 잡히지 않는 편한 바지를 입은 채 자전거를 타고 순천시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매일 새벽 3시40분께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LPG 충전소, 대중목욕탕, 새벽교회, 상가 등 밤 12시까지 지역구 곳곳을 샅샅이 훑었다고 한다.

암수술을 세 차례 받고 투병 중인 그의 아내 김미경 씨도 이 의원이 미처 챙기지 못했던 양로원 등을 돌며 그를 도왔다. 여기에 재광·재경향우회와 경제인, 공무원, 교수 등 그의 진심을 아는 ‘이사모’(이정현을 사랑하는 범국민모임) 회원들이 “이정현이 나서야 지역발전을 앞당길 수 있다”며 소리 없이 그를 도왔다. 이런 노력들이 하나로 모아져 이 의원은 호남의 새정치민주연합 지역구의원 29명에 맞서는 여당 유일의 지역구 의원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호남의 유일한 새누리당 지역구 의원으로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가?

“호남에도 여당의원의 역할이 분명하게 있다는 것을 앞으로 제가 확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예를 들어 당장 정부 예산안만 하더라도 정부 여당안이 확정돼서 국회에 내려오면 국회의원들이 심의해서 주로 삭감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호남에 있는 29명의 야당 국회의원이 그동안 호남의 시급한 현안을 누가 제대로 얘기하기나 했나? 이것이 안 돼 있었기 때문에 호남 사람들이 그런 부분에서 주요 예산이 삭감되는 손해를 봐왔었던 것이다. 저는 앞으로 호남과 관련된 현안 사업을 국회에서 적극적으로 얘기할 것이다. 그래서 새정치민주연합의 호남 의원 29명보다 제가 지역 발전에 훨씬 기여한다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겠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 “예산은 힘이 아니라 논리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해온 그의 고향에 대한 열정은 여의도 국회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8대 국회의 비례대표 의원으로 활약하며 ‘호남예산 지킴이’로 통했다. 예산확보를 위해 광주·전남에서 올라온 시청과 도청 공무원들에게 자신의 의원회관 한쪽 자리를 내주었고, 그가 직접 해당부처에 전화를 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직접 장관을 찾아가 자신의 일처럼 거들어주기도 했다. 그는 신속하게 호남 여론을 파악하고 현안에 대처하는 발 빠른 행보로 호남 공직사회의 신망을 얻었다.

“새누리당,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아야”

그의 예산확보 노력은 집요했다. 이 의원의 얘기다. 2008년 여름 휴가 때 광주에 있던 보좌진에게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고 했다. 신안 앞바다에 유조선이 충돌해서 기름이 유출되고 있다는 전화였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생각한 그는 바로 신안 현장으로 달려갔다. 피해 규모가 커서 10억 원이 추가로 필요한 상황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당시 박희태 대표를 비롯해 당 정책위 의장, 원내대표에게 차례로 전화를 걸어 “특별교부세 10억 원만 확보해주십시오”라고 애타게 호소했다.

그 같은 정성으로 마침내 10억 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는데, 당시 박희태 대표의 말이 걸작이다. “우리 한나라당에게 참 부족한 부분이 현장성이다. 그런데 이정현 의원이 이 무더위에, 그것도 여름휴가 때 그렇게 빨리 현장으로 달려가 현황을 살피고 대책을 이렇게 요구해오니, 너무 고마워서 이 이원의 건의를 해결해주고 싶었다. 정말 치하한다.”

청와대에서 박근혜 정부 성공을 위해 기여했으니 앞으로는 당에서 지명직 최고위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애기도 나온다.

“새누리당의 성공,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해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고 헌신할 것은 헌신하는 것은 조직인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자기 정당에서 대통령이 나왔고, 대통령을 만들었으면 그 정권과 그 대통령이 성공하도록 진력하는 게 당원으로서 당연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새누리당에서 대통령이 나왔다면 그 대통령과 그 당이 추구하는 정책과 노선, 정권 재창출에 모두가 다 함께 고민하는 것이지 특정 개인만 당에 충성하고 안하고 한다는 게 어디 있는가?”

그러면 앞으로 당청(黨靑) 간 채널 역할을 제대로 하겠다는 것인가?

“당청 간 가교 역할이든 당정(黨政)이든 대야(對野) 소통문제 등 제가 할 역할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하겠다. 지역구 의원으로서 지역일은 지역일 대로 하면서 중앙정치에서 해야 할 역할도 제대로 하겠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지만 이정현 개인이 하는 게 아니다. 조직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어느 조직이든 자기 조직이 잘못하고 있으면 바로잡고 국민의 여론에 반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면 온몸을 던져서라도 막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성공적인 정권, 정부가 되게 하는 것이 정당의 당원으로서 당연한 도리이고 책무가 아니겠는가!”

김무성 대표가 장악하고 있는 새누리당에서 친박계 핵심인 그가 당청 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측되는 대목이다. 그는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다. 오래전부터 ‘촌놈은 두려울 것이 없다. 옳다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겠다’는 근성의 소유자다. 2004년 총선이 끝난 뒤 박근혜 당시 대표와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그는 “한나라당이 호남을 포기하면 안된다. 지역대결 구도를 깨고 동서화합을 해야 한다”며 호남을 홀대하는 한나라당의 정책에 대해 평소 소신을 거침없이 말하며 열변을 토했다. 당시 박 대표가 “어떻게 그렇게 말씀을 잘하세요”라며 이 의원의 진정성을 높이 샀다는 것은 정가에 잘 알려진 일화다.

이 의원의 정치입문의 계기가 되었던 구용상 전 의원과의 만남도 사실은 정치학도였던 ‘청년 이정현’이 구 의원의 잘못을 따지러 갔다가 구 의원이 그 기백에 반해 비서로 발탁했다고 알려진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할말은 하고 보는’ 그의 추진력과 저돌성은 그러나 필연적으로 박근혜 청와대에서 그 반작용도 불러왔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갑작스럽게 터진 세월호 참사의 유탄을 맞고 지난 6월 청와대 홍보수석에서 물러나야 했다. 기자는 그 이유가 궁금했었다.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오래 대통령 곁을 지킬 줄 알았는데.

“허허. 그 부분은 노코멘트다”.

홍보수석 시절에 KBS 보도나 인사문제에 개입했다는 말이 있었는데 혹시라도 잘못 알려지거나 억울한 점이 있었나?

“(손사래를 치며) 그것도 노코멘트다. 그 문제에 대해 제가 지금까지 잘못했다고 드러난 것도 없지 않느냐? 제가 잘못한 게 없으니 억울할 것도 없다. 음해하고 모략하는 것이야 지금까지 정치권에서 수도 없이 있어 왔던 얘기다.”

2011년 이정현 의원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던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이 의원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전국적 이미지 구축? 위선적인 정치는 안 해

기자에겐 가슴 속에 할 말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로 들렸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기회가 되면 속사정도 들을 수 있을 터였다. 이 의원은 지금도 새누리당 내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자 속마음까지 파악할 줄 아는 박 대통령의 충실한 전달자로 꼽힌다. 2012년 대선 개표날 저녁, 당시 박근혜 당선자가 당직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여의도 당사에 도착했을 때 이 의원이 상황실의 한쪽 귀퉁이에서 박 대표와 악수하면서 기쁨의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는 것은 새누리당 당직자들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 의원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전라도 사투리는 손으로 옆 사람을 살짝 치는 척하며 코맹맹이 소리로 하는 “아이고~ 어째야 쓰까잉~”이라고 한다. 애잔한 마음을 어떻게 다 표현할 길이 없을 때 쓰는 말인데, 너무도 정감 어린 소리로 들려 박 대통령이 좋아한다고 한다.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을 떠난 그가 당선가능성이 희박한 순천·곡성에 출마한다고 했을 때 박 대통령이 딱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의 우려와 달리 개선장군이 돼 보란듯이 새누리당 지도부에 입성했다. 그런 그에게 앞으로도 대통령의 신임이 실릴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것은 정략적인 생각일 뿐이다. 저는 전국적인 이미지를 가질 이유도 없고, 그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도 않다. 이번에 저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순천·곡성 사람들이 바라고 원하는 정치를 하면 그 자체로서 국민들로부터 평가받는 길이지 전국적인 이미지를 따로 만들고 한다는 것은 모두 말장난에 놀아나는 것이다.

전국적인 이미지를 억지로 만들었다가 중간에 거꾸러져서 정치 폐인된 사람이 하나둘인가? 그렇게 위선적으로 이미지 정치하고,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하다가 대한민국 정치도 망치고, 자기도 망치는 수도 없는 사례들을 보지도 못했나?(기자는 이 대목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몇몇 잠룡을 떠올렸다.) 정치인의 전국적인 이미지라는 것은 국민들이 만들어주는 것이다. 자기 일에 충실하면 된다. 그러면 국민들이 다 알아본다.”

이 의원은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국민들이 알아본 것 아닌가.

“그렇다고 봐야 하나?(웃음) 진정성으로 대하면 호남에서도 새누리당이 당선되는 세상이다. 진정성을 가지고 하면 국민이 알고 박수를 친다. 그렇지 않고 정치인이 자기 이미지를 억지로 만들려고 한다면 국민을 무시하는 것밖에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지금은 이미지 정치가 통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는 진정성으로 승부하는 남자다. 그가 2011년 출판기념회를 하며 펴낸 책 이름도 <진심이면 통합니다>였다. 이번에도 그의 진심 어린 호소가 통했기에 호남의 유권자들이 그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는 “미치도록 일하고 싶습니다. 2년만 쓰고 못하면 그때 가서 버려주십시오”라는 절박한 호소로 순천·곡성 지역민들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다.

“가슴 벅차 잠이 오지 않는다”

국회의원 말고 더 큰 꿈이 있나?

“(손사래를 치며) 국회의원으로서 충실하는 것이지, 그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 저는 햇병아리다. 당선된 지 3일된 사람이다.”

그래도 벌써 재선 아닌가?

“국회에 재선의원이 어디 한두 명인가? 국회의원으로서 국회의원 일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억지로 웃자라려고 하면 뽑힌다.”(웃음)

쉴 새 없이 돌아다녀서였을까? 기자와 대화하는 간간이 그는 피곤한 듯 눈을 감고 말했다. 얼굴은 검게 그을리고 앞머리 숱은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인터뷰를 마칠 때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다.

선거가 끝났는데, 왜 상경하지 않았나?

“(그는 이 대목에서 잠시 말이 없었다.) 가슴이 벅차서 도대체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유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잠도 안 오고 드러누워 있을 수가 없다. 이 고마움에 대한 가슴 뜨거움이 어느 정도 식을 때까지는 지역민들을 만나서 감사표시를 하고 싶다. 지역을 다니면서 지역 현안들도 살펴보고 예산의 우선 순위도 들어보고 있다. 오늘 아침에도 태풍 때문에 피해를 본 승주 낙안의 배 낙과 현장, 복숭아 낙과현장을 다녀왔다. 곡성과 순천의 예산 담당자들을 만나서 지역의 현안들과 관련한 회의를 했고, 마을과 아파트 구석구석을 다니며 인사하고 있다. 선거운동 때처럼 새벽에 똑같이 일어나서 다니고 있다. 가슴이 뜨거워서, 벅차서, 너무 (지역민들에게) 고마워서 그렇다.”

헤어질 때 보니 그의 차 안에는 그가 일요일 아침 교회에 다녀올 때 펴 들었던 성경책과 농촌 현장에 갈 때 입는 점퍼 상의 두 벌이 한쪽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다. 그는 “하루에 전화가 천 통이 넘게 걸려온다. 내가 받지도 못한다. 더 많은 시간을 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다.

지난 7·30 선거에서 ‘새누리당의 호남정치 경쟁력 회복’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그는 8월 7일 당 최고위원으로 지도부에 입성한 뒤 새누리당 지도부에 요청해 8월 14일에 전남 광양에서 현장최고위원회의를 갖는 등 실세 최고위원으로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의 좌우명은 대공심대공심(大空心大公心)이다. 마음을 크게 비워 사욕을 버리고 공익을 위해 크게 봉사한다는 뜻이다.

“당청 간 가교 역할을 잘할 만한 이 중 이정현만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새누리당 안팎의 평가이고 보면 당분간 그는 당정청(黨政靑)의 사정에 두루 밝은 여권의 뉴스메이커로 집중조명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곧되(貞) 실용적(鉉)으로 살라는 그의 이름의 의미가 현실정치 속에서 어떻게 발휘될지 관심 갖고 지켜볼 일이다.

나권일 기자 naf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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