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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을 가다 ②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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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지난 2월27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7차 회의에서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기념일'(9월3일)과 함께 ‘난징(南京)대학살 희생자추모일(12월 13일)’도 올해 처음으로 법정 국가기념일로 지정ㆍ확정했다. 난징대학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추모식은 중국인들의 오랜 염원이었다. 1937년 12월 13일 중국을 침략한 일본은 난징에서 40여일 동안 양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1994년 이래 매년 12월13일 중국 장쑤성(江蘇省·강소성)과 난징(南京)시는 희생자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다. 기념관은 이러한 역사를 잊지않도록 사진과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은 1937년 12월∼1938년 1월 당시 중국 수도 난징과 그 주변에서 일본의 중지파견군 사령관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휘하의 일본군이 자행한 중국인 포로ㆍ일반시민 대학살 사건이다. 중국은 ‘난징(南京)대학살 희생자 추모일(12월 13일)’도 ‘항일전쟁승리기념일’과 마찬가지로 올해 처음으로 법정 국가기념일로 지난 2월 지정했다. 중국은 이날도 대규모 추모행사를 거행해 30여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한 일본의 참혹한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릴 계획이다.

난징에서 일본군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자비한 학살을 감행했다. 특히 여성들은 어린아이ㆍ노인 가리지않고 강간했다. 희생된 여성만 최대 8만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처형 방법도 잔혹했다. 집단 총살, 참수, 생매장, 십자가에 매달기, 혀에 매달기 등. 갓난아기를 던진 뒤 총검으로 찔러 죽이기도했다. 죽이기 전에 근친상간도 강요했다.

학살과 집단 강간은 1938년 2월까지 6주 넘게 계속됐다. 종전 후 마쓰이와 두 명의 중장이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했다. 하지만 이들 외에 책임 추궁은 거의 없었다. 중국은 난징대학살에 대해 일본에 공식 사과와 배상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은 여전히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고 있다.

일본 731부대의 잔혹한 고문기구들이다. 731부대는 인간 생체실험을 한 부대다. 생체해부, 세균 공격 전쟁, 무기실험, 고문 등 비인간성적인 만행을 저지른 부대다.

중국의 항일전쟁에 참여한 영웅들을 묘사한 조각품이다. 홍콩 문회보(文匯報) 의 지난 2005년 8월15일 보도에 따르면 일본의 중국 침략과 잔학행위로 전세계 2차 세계대전 희생자 5500만명의 5분의2에 달하는 2100만명의 중국인이 숨지고 1400만명이 부상당했다. 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돼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까지 중국 전역이 항일 격전지가 되면서 일본의 살육과 무차별폭격에 따른 것이다. 난징 대학살의 희생자 30망명도 포함한 수치다. 반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150망여명이 사망했다.

악보는 당시 항일전쟁에서 목숨을 바쳐 싸운 인민들이 부른 ‘의용군진행곡(義勇軍進行曲)’이다. '의용군진행곡'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國歌)다. 톈한(田漢)이 작사, 녜얼이 작곡했다. 이 곡은 중국의 항일투쟁을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이 곡은 1949년 9월 27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회의'에서 통과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로 공식 제정된다. 하지만 이 곡의 작곡가 톈한이 문화대혁명 때 우파 분자로 낙인찍혀 숙청당하면서 금지되었고 대신 비공식 국가인 ‘동방홍(東方紅)’이 중국 국가를 대신했다. 이후 1978년 3월 5일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는 이곡에 새로운 가사를 만들어 통과시켰다. 하지만 새로운 가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쏟아졌다. 특히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을 잊었느냐는 등의 항의가 이어졌다. 이후 1982년 12월 4일에 열린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5차 회의'에서 ‘의용군 진행곡’을 다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로 지정했다. 2004년 3월 14일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2차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수정안이 통과되었는데, 이 헌법에서 중국 국가를 ‘의용군 진행곡’으로 정했다.

'팔로군(八路軍)'의 전투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팔로군은 1937∼1945년 일본군과 싸운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 중 하나다. 정식명칭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 1927년 난창(南昌) 폭동 때는 홍군(紅軍)으로 불렸다.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 후에 '국민혁명군 제팔로군'으로 개칭했다. 신사군(新四軍)과 함께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한 부대다. 1947년에 '인민해방군'으로 다시 명칭을 바꿨다.

‘화교(華僑)’란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 국적의 중국인'을 의미한다. 중국 역대 왕조는 화교를 ‘버려진 백성’,‘기민(棄民)’이라 부르며 배척했다. 하지만 19세기말 서구열강의 침입에 맞서 해외 정보와 근대화 추진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던 청나라는 이들에게 화교란 이름을 지어주며 화친했다. 1911년 쑨원이 신해혁명을 통해 화교의 후원으로 청나라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건립하면서 화교들의 중국에 대한 애국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중국 대륙인들보다 더 중국을 사랑하게 된 화교들은 항일전쟁에도 모범적으로 참전했다. 사진은 말레이시아에서 일본군에 맞서싸운 중국 화교부대원들의 모습이다. 이 중 이월미(李月美ㆍ이웨메이ㆍ가운데줄 왼쪽에서 여섯번째)라는 여성은 남장을 하고 참전했다. 이월미는 전투 중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어느 누구도 여자인 줄 몰랐다.

1941년 12월 11일 일본은 버마(현재 미얀마)를 침공했다. 일본군 3만여명은 버마를 공격, 3월8일 랑군을 점령했다. 영국ㆍ인도군은 퇴각했다. 중국의 장개석(蔣介石·장제스) 은 중국으로 들어오는 연합군의 보급물품이 끊기는 것을 막기위해 10만 병력을 파견하지만 패배하고만다. 보급이 막힌 중국은 미국과 함께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군수품을 실어나르는 작전을 시작한다. 이 작전은 1942년 5월부터 1945년 8월까지 계속된다. 이 기간동안 비행기로 실어나른 군수품은 80여만톤에 이른다. 작전 중 격추ㆍ실종된 비행기는 609대다. 실종ㆍ희생된 조종사는 1500여명에 달한다. 이 비행경로는 낙타혹과 닮았다해 ‘타봉(駝峰)비행노선’이라 부르고 있다. 전시장 이곳은 당시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비행기들을 재현해 보여주는 영상화면이다. 아래는 당시 격추된 비행기 잔해들이다. 중국이 보존을 위해 히말랴야에서 직접 수거해왔다.

1945년 9월 9일 당시 수도였던 난징에서 일본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가 중국 육군 사령관에게 고개 숙여 항복하는 의식을 그린 작품이다.

중국인민항일전쟁 승리 기념일(9월3일)과 ‘난징(南京)대학살 희생자 추모일(12월 13일)’을 올해 처음으로 법정 국가기념일로 지정ㆍ확정한 지난 2월 27일 열린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장면이다.

베이징=글ㆍ사진 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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