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수칙 무시로 봉변자초-미결수 탈출을 계기로 본 행형의 문제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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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교정현대화를 내세운 전국교도소장회의가 열린지 하루만에 행형이 허를 찔렀다.
이번 사건은 우리나라 행형 60년의 고질을 단적으로 나타낸 전형적인 표본.
교도관의 방심과 직무태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74년10월17일, 이번 사고가난 1호 법정에서는 살인죄로 재판을 받던 임병석 피고인이 증인으로 나온 애인의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법정 살인극이 있었다.
당시임은 법원 뒷담을 넘어 달아나다 1시간 뒤에 붙잡히기는 했지만 그때도 길이 20㎝되는 줄칼을 몸에 숨겨 나왔는데도 발견치 못해 문제가 됐었다.
이밖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구속피고인들의 법정 난동은 여러 차례 있었다.
71년과 74년초 서울 형사지법에서 재판을 받던 피고인이 재판장의 형량선고에 불만, 미리 준비한 인분뭉치를 던진 일이라든지, 수갑을 풀어 판·검사에게 던진 난동도 있었다.
모두 교도관들이 계호상의 절차를 밟지 않아 거듭해 일어난 사고였다.
이번에도 교도관들이 기본 수칙을 지키지 않았다. 우선 탈주 범들이 모두 전과 5∼7범인데다 검거당시 경찰관에게 칼을 휘둘러 상처까지 입힌 흉악범들이었으므로 계호 및 호송에는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행형법에 사건과 관련 있는 자는 공범부호를 붙이고 분리수용하며 이동 때에는 동행을 금지하고 있는데도 교도관들은 이 같은 기본수칙조차 지키지 않았다.
또 입질하는 재소자는 신체와 의류를 철저히 검사하고 면회를 위한 출입자도 신체와 휴대품을 조사하며 「모의」를 막기 위해 면회실에도 교도관이 입회하도록 되어있다.
매일 1회 이상 교도관이 감방 안을 수색토록 되어있어 최소한 법대로만 지켜졌더라도 범인들은 길이20㎝나 되는 칼을 소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호송도중 교도관들은 계구와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데 이것마저 적절히 사용하지 못했다.
계구는 포승·수갑 등으로 법정에서 공판이 끝나면 포승으로 가슴 부분과 두 팔을 묶고 피고인 5∼6명씩을 한데 엮어 호송하는 것이 관례.
이 때 교도관들은 권총과 카빈 등 무기를 휴대해 피고인들의 도주를 막도록 되어있다.
행형법에는 ▲교도관에게 폭행 또는 협박하거나 사태가 위험하다고 인정되는 때 ▲폭행 또는 협박에 사용 할 위험물을 소지하고 명령에 불응할 때 ▲도주할 목적으로 다중이 소요할 때 ▲도주를 기도하는 자가 제지에 불응할 때 등에 교도관이 무기률 사용토록 규정하고 있다.
전형적으로 이번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웬일인지 교도관들은 공포 1발조차 쏘아보지 못했다.
방심한 까닭에 실탄을 갖고있지 않았거나 범인들의 기세에 눌려 엄두를 내지 못했거나 어느 쪽이든 한심한 교도관들의 근무자세다.
이것은 교도관에 대한 나쁜 처우·복무여건과 직결된다.
우리나라 교도 관수는 재소자 7·7명당 1명 꼴로 일본의 1대4에 비해 거의 두배다.
작업감독·보안·교정·계호 등 작업량이 많아 격일근무제지만 비번 날의 출근도 예사다. 교도(5급을)·교사보·교사·교위·교감보·교감·교정(2급 갑)의 직급 중 80%이상이 교도로 이들은 한 달에 12만∼15만원의 봉급을 받고 있다.
재소자와 함께 옥살이를 하는 격인데 대우가 너무 나쁘다는 것이 이들의 한결같은 불평이다.
이 때문에 한 때는 영치금횡령, 재소자 상대물품판매, 금품수수 등 말썽이 뒤따른 적도 있었다.
법무부는 교정행정의 개선책으로 ▲계호 담당 교도관의 근무수당을 월1만원에서 2만3천원으로 인상하고 ▲국립교정병원을 세우며 ▲교정대학을 세워 교도관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방침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교정행정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의 불 인식이 개선되고 교도관들의 긍지가 높아지지 않는 한 이 같은 사고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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