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로 보는 세상] 그래도 가족이 제일 좋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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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아이들이 몰려 있다. 마치 그 옛날 시골 무논의 물꼬 밑에 미꾸라지 꾀듯 한 모습이다. 학용품 사는 녀석, 뽑기통 들여다보는 녀석, 게임기 앞에 쭈그려 앉은 녀석, 입에 사탕을 물고 있는 녀석 등 아이들은 저마다 볼일(?)에 바쁘다. 참으로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다. 그런데 나는 학교 앞을 지나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뜬금없게도 불안한 마음이 든다.

왜 그럴까? 엉뚱하게도, 저 아이들의 집안이 ‘두루’ 편안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떠들썩한 아이들의 조잘거림 속에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은 불안함. 그 불안함이 평화로운 아침 풍경을 일그러지게 한다. 어제 오늘 일만은 아니지만 요즘 들어 무너지는 가족이 더욱 많다. 가장이 실직해서, 사업이 망해서,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아서, 교통사고 같은 게 나서. 가족이 무너지는 이유도 가지가지다. 그렇다면, 겉으론 웃거나 떠들지만 분명 적지 않은 아이들의 가슴 속에는 무너진 가족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어른들이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애들은 몰라도 돼!’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에게 어른들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할 때 쉽게 내뱉는 말이다. 이 말 속엔 아이들은 아직 덜 자란 존재니까 어른들 일에 감히 아는 척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들어 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너는 네 할 일이나 잘 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덜 자란 존재이기에 어른들 일과 상관없이 자기 일이나 잘 하면 그만일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세상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세상 일에 더 휘둘리며 살아야 한다. 아이들은 아직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족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다치는 대상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지지고 볶더라도’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 덜 불안하다. 설령 아버지가 돈을 못 벌더라도,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있더라도, 흥부네 자식처럼 못 먹고 헐벗더라도 아이들은 가족을 원한다.

노경실은 동화 작업을 시작한 이래 줄곧 가족 이야기를 써왔다. 현역 작가 가운데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가족 이야기를 그만큼 많이 생산해낸 작가는 없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복실이네 가족사진』(산하)을 보면 그 까닭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30~40 년 전 가난한 시절 이야기다.

가난하기에 겪어야 하는 삶의 애환이 어쩔 수 없이 바닥에 깔려 있지만, 그 애환을 바탕으로 하여 피어나는 가족 사이의 정이 듬뿍 담겨 있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그때를 아십니까?’유의 희미한 회고조 이야기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흘러간 옛 모습을 통해 언제고 변하지 않을 삶의 의미를 줄기차게 되물으며, 삶의 바탕인 ‘가족’의 의미를 깊이 새김으로써 작품의 현재적 의미를 놓치지 않는다. 노경실에게 가족은 그의 목숨이고 이야기 밭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가족을 이야기로 쓴다.

*** 부자지간은 원래 복잡

이금이에게 가족은 흩어지면 다시 모여야 하고, 어디가 조금 어긋나면 다시 바로잡아서라도 지탱하고자 하는 ‘신앙’이다. 적지 않은 작품 활동 기간에 그는 줄곧 가족 안에서도 아이들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써왔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나오는 아이들은 ‘성장’을 한다. 작가가 나이 들어가는 정도로 같이 자라나는 것이다. 그만큼 작가 자신이 등장인물에 깊이 투영된다는 얘기일 것이다. 『밤티마을 큰돌이네 집』(푸른책들)은 자칫 통속으로 떨어질 수 있을 정도로 아슬아슬하다. 장애를 가진 할아버지, 늘 화난 표정의 아버지, 집 나간 엄마, 새엄마, 수양딸로 간 아이. 그러나 작가는 특유의 입담으로 인물의 통속성을 벗기고 인물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냄으로써 ‘이금이 표’ 동화 세계를 지킨다.

외국 작품인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로버트 뉴턴 팩 지음, 사계절)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다. 무지하게 추운 겨울의 가난을 견뎌내기 위해 아들이 정을 주며 친구처럼 지내던 아기돼지를 죽여야 하는 아버지. 아기돼지를 죽이고 나서 돌아서 눈물 흘리던 아버지. 가난이 뭔지 알아야 하는 아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의 눈물까지 이해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서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이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아들은 끊임없이 아버지의 권위와 아버지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인류가 생긴 이래 이처럼 복잡한 인간 관계도 흔치 않을 것이다. 마침내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은 훌쩍 자란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족은 어쩌면 남보다 더 ‘징글징글하고 상처 주는 집단’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인간은 가족을 잃으면 못 견뎌 하고 또다시 새로운 가족을 꿈꾼다. 어느 시인의 말마따나 ‘외로우니까 사람’이라서 그러는 걸까? 어찌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그 슬픈 울타리라니!

박상률(동화작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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