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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5)제73화 증권시장(53)|「한일증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일증권을 인수한 필자는 명동구 증권거래소건물 앞에 있는 살림집 2층에 사무실을 차리고 간판을 내걸었다.
막상 회사 문을 열었으나 운영자금이 없었다. 당시 시가 1천5백 만원 짜리 살림집을 동양화재보험에 담보로 하여 대한증권거래소 주식 8백 만원 어치를 빌었다.
이것을 증권거래소에 증거금으로 넣고 한일증권회사운영을 시작했다.
8·15해방 후 당시까지 나는 거의 매일 밤 12시가 되어서야 술에 취해 집에 돌아왔다.
어수선한 사회분위기 탓도 있었겠지만 동경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혼탁한 생활이었다.
한일증권을 인수하기 전년 12월24일로 기억된다. 집사람이 같이 갈곳이 있다며 부추겼다. 무작정 따라나서니 전 국회의사당 뒤 대한성공회성당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자기와 4남매가 신부님에게서 영세 받는 장면을 지켜보라는 것이었다. 성사가 끝난 뒤 관할 사제심 신부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더니 나보고도 나오라고 권했다.
아이들과 같이 몇 차례 미사에도 참석했으나 무신논자가 하루아침에 종교인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잡히면서 열심히 노력한 끝에 다음해 부활절엔 영세를 받고 이어 성진성사(영세한 신자에게 은총을 더하기 위해 사교가 신자의 이마에 성유를 바르고 성신과 그의 칠은을 주는 의식)도 받았다.
그러니까 필자가 대한성공회에 입문한 뒤 6개월쯤 된 때에 동해전기와 교환으로 한일증권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열심히 뛴 결과 6개월간의 거래실적만으로도 다른 증권회사의 1년간 실적을 능가했다.
다음해 1월4일 시무식에선 l등 상을 타게됐다.
6개월밖에 안된 한일증권이 그때까지 1등 상을 도맡다시피 해온 대한증권(대표 송대순씨)을 따돌리고 수위자리를 차지하자 증권계는 깜짝 놀랐다.
그 당시 나는 고객들의 국채 18억원 어치를 맡아 가지고 있었다.
증권회사 운영을 시작한 첫해에 거래실적 1위를 차지한 필자는 해가 바뀐 58년1월 희망찬 신년계획을 세우기에 바빴다.
17일 아침에도 평상시와 같이 새벽기도를 마친 뒤 아침을 먹고 2층 사무실로 올라갔다.
국채파동으로 재무장관 김현철씨가 명령을 발동하여 16일의 모든 매매를 무효로 선언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소위 1·16국채파동이다. 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쳤으나 처음 당하는 일이라 잘 되겠지 하고 침착하기로 했다.
그러나 거래소로 나가보고 사태의 중대성을 느꼈다.
거래소가 문을 닫고 거래가 중단되면 월말수도결제대금 2억3천만원은 어디서 구하며 매도한 사람에게 월말에 지불해야하는 매도대금 1억5천만원은 어떻게 구할 것인가가 큰 문제였다.
거래가 정지된 상태에서 월말수도결제대금 2억3천만원의 현금을 구할 길이 막연했다.
당시는 청산거래제도여서 매수 측은 매수증거금으로 30%정도 내면 됐으므로 증거금을 포기하고 월말수도대금을 가져 올리가 없었다.
그러나 매도 측은 고객들이 월말에 매물을 가져오면 매도대금을 지불해 주어야하므로 월말수도대금 외에도 막대한 매도대금이 있어야 했다.
나는 개성출신 사채업자로부터 국채를 담보로 빈 고리채로 우선 거래소수도대금을 결제하여 위약처분은 면했다.
월말이 되자 고객들의 매도대금결제가 문제였다. 물건 판 돈을 내라고 고객들은 아우성을 쳤다.
갖고있는 국채는 사채업자에게 맡겨 수도결제대금 2억3천 만원을 융통했던 터라 더 이상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하루아침에 1억5천 만원이란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됐다. 50명의 채권자가 생겨났다. 그 중에는 뒤에 재무부 이재 국장을 지낸 박동섭씨의 부친인 박경하씨가 7천 만원으로 가장 많았고 조동엽씨가 3천여 만원으로 다음으로 많았다.
무역회사와 관리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채권자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채권자들에게 당분간만 참아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러나 조씨는 2월까지만 기다려보고 결제치 않으면 고소하겠다며 강경하게 나왔다.
조씨는 나의 옆집인 대한증권 송대순씨에게 죽 거래를 해오다가 한일증권과의 첫 거래에서 국채파동에 걸려버렸다.
급기야 2월 말일이 도래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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