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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최후보루…어제와 오늘(하)|소신과 국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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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신뿐이다.』고 기독교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법관으로 하여금 그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법관에게는 오랜 경륜과 엄격한 수양이 요구되어 왔고 최고의 법관인 대법원 판사에게는 더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들에게 『당신은 신처럼 완벽하게 심판할 수 있는가』고 묻는 것만큼 오뇌에 차게 하는 물음은 없을 것이다. 법복을 입고 있는 한 진리와 정의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고독하고 외로운 구도자임엔 틀림없으나 그들도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호 긋고 재판 임해>
평양복심법원의 이찬형 판사는 살인사건의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형이 집행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살인범이 나타났다. 오판(오판) 이었다.
젊은 이 판사는 그날로 법복을 벗어버리고 금강산 암자에 들어가 불도에 귀의했다. 그가 훗날 우리 나라에서 손꼽는 선승 중의 한 분인 효봉 스님이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는 경남밀양의 표충사를 마지막 주석(승려가 안주하는 곳)으로 80고령에 입적할 때까지 전국산하를 방랑하며 마음의 고뇌를 면벽수단으로 잊으려 했다.
20년 전 작고한 전 서울고등법원장 김홍섭씨는 재판정에 들어서기 전 꼭 성호(성호)를 긋고· 고해성사(고해성사)에 임하는 신부처럼 엄숙한 마음을 다지곤 했다고 한다.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가졌던 그는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데 어쩌면 회의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민사재판은 대개 재산다툼이 주가 되지만 형사재판은 법정 앞에선 피고인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일반은 법관은 가운을 「마력의 날개」라고도 하지만 법관 스스로는 「고민의 날개」라 부르고 있다.
모든 법관이 검은 가운을 입고 법정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대법원규칙 제268호에 의해서다.
앞섶에 숨김 단추 3개가 달려있고 구두 굽에서 20cm 위쪽까지 내려진 이 법복은 미국식으로 66년1월15일에 만든 「법관 복에 관한 규칙」에 따라 의상 디자이너 이용화씨가 마련한 것이다.

<마음가짐 제일중요>
김병노 대법원장 시절인 53년3월5일 만든 판검사 및 변호사법복은 정강이까지 내려와 학생들 오바 같았고 가슴엔 직경 20cm의 무궁화무늬가 있었다.
법모는 투구처럼 높아 얼굴 작은 판사는 법복과 법모에 휘말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었다.
비록 4만원짜리 밖에 안 되는 가운이지만 법복의 위력이 개인의 생사여탈을 좌우하는만큼 법복인생은 언제나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의 법복을 마련한 당시의 조진만 대법원장은 『법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복을 입은 법관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자세와 더불어 사법부의 현대화, 사법부의 독립, 신선한 사법부상을 위해선 「루비콘」 강을 건너는 「시저」의 박진감과 함께 「마리아」상 앞에 기도하는 소녀의 경건함이 조화되어야겠다고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대법원은 전통적 보수성과 급변하는 세태에 대처해야한다는 당위(당위)가 엇갈리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진통을 겪고있다.
최고법관들의 세속화를 막아야한다는 성역화주장이 있는가하면 대법원도 시대감각에 맞게 적응해야한다는 개화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사들 사이에 골프가 유행됐던 것이 이즈음을 전후한 것은 상당히 시사적인 일이다. 과중한 업무에 쫓겨 취미생활은 물론 간단한 운동조차 제대로 즐길 수 없다는 실정을 듣고 당시 청와대에서 골프세트를 선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양회경·이영섭·주재황 씨를 빼고는 상당수가 그린필드에 나가 여가를 즐겼다. 그 때까지만 해도 대법원판사들의 취미는 무 취미나 독서가 90%였다. 그 나머지도 붓글씨·수석감상 같은 정적이고 1인적인 것이었다.
골프 붐이 일자 일부에서는 『최고법관들이 대중들과 어울리는 게 보기 좋은 거 아니냐』 는 비난이 나왔다. 적절한 비유였는지 모르지만 「스위스」 법정에 있는 바른손이 없는 법관의 흉상이야기도 나왔다. 『판사는 결코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뜻으로 나타낸 흉상이야기다.

<법에 순사하는 용기>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세상에 떠들던 법원주변의 「관습」이 대법원 판사실에까지 번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의 비난이었지만 적어도 요즘 와서는 골프 치는 걸 입에 울리는 사람은 없다. 시대감각이 그만큼 변한 것이다.
법관들의 기본적인 자세에 국가이익을 관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사법부 고위층에 의해 적시된 것은 유신직후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원로 선배법관들은 『기록과 증거에 따라 소신대로 판단하라』 『법에 순사하는 용기를 가져라』 『국민의 생명·재산·자유의 절대수호자가 되라』고 교과서적인 사법권의 사명 그 자체를 강조했었다.
그러나 유신이후부터는 법관들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사법권의 사명에 앞서 국가관이 강조되었다.
제5공화국의 「사법부」가 출범했다. 변호인석·검찰관석·피고인석보다 법대가 높은 것은 법관에 대한 권위와 신뢰를 상징하는 것이다. 젊고 활기찬 새 사법부에 국민의 기대는 크다.
『나라가 망할 때는 사법부가 먼저 없어지고, 나라가 일어설 때는 사법부가 먼저 일어선다』 는 「로마」시대부터의 명언은 오늘의 우리 가슴에도 살아있는 것이다. <고정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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