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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의 윤활유인가|부가해…"돈다"는 속성상실|풀어도 풀어도 은행으로 되돌아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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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작년말이후 돈을 많이풀고 있는데도 경기는 계속 침체상을 못벗어나고 있다. 시중에 돈이 적어서일까, 아니면 다른 원인 때문일까. 정부는 급한대로 돈을 풀어경제를 활성화시켜 보려고한다. 일부에서는 금리도 인하하자는 주장을 강력히 내세우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현재의 인플레커브는 가파르다. 과연 돈을 풀어서 해결될 문제인가 돈을 통해 오늘의 경제를 진단해 본다.<편집자주>
『돈이 나가면 들지를 않고 곧바로 은행으로 되돌아온다.』(S은행 K부장)
『돈을 풀었다고 하는데도 경기는 나아지는 것같지 않다.』(청계천 기계부품상주인 김모씨)
돌아야 할돈이 돌지를 않고 돈을 많이 풀어도 경기가 움직이지 않는 현상- 이것이 요즈음「이코너미스트」들을 당혹케하는 불가사의중의 하나다.
돈이 많이 풀리기 시작한것은 작년11월. 지난 3월중에만도 5천6백억원이 새로 풀려나갔다.
이래서 국내여신총잔액은 3월말현재 17조8천9백4억원.
2·4분기중에 다시 1조2천5백억원을 풀겠다고 한다.
이많은 돈이 어디로 흘러가서 무엇을 하고있는 것인가.
지난 「3·25」총선을 전후해서 선거자금으로 풀린것만도 줄잡아 1천5백억원은 되리라는추산이다.
3월21일부터 25일까지 선거를 앞둔 불과5일사이에 화폐발행액이 3백7억원이나 급증한 것은 선거자금수요와 무관할수 없다.
경제학박사인 남덕우총리는 총선직후 『이번 선거에 1천2백억원정도는 풀려나간것으로 추산한다』면서 『그러나 경제에는 별다른 충격은 주지않을것』이라고 주석을 단바있다.
그만큼 우리경제도 볼륨이 커켰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것같다.
실제는 남총리가 추산한것보다는 더 많이 뿌려졌을 것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있다.
선거자금이란것은 소비성금융이다. 해서 언제나 총선이 끝난 직후에는 「선거 인플레」를겪게 마련이다.
돈이 많이 풀리고 그위에 총선거까지 있었으니까 경기가 다시 흥청거릴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기대했었다.
더구나 정부공사의 조기발주, 불편했던 한미관계의 호전, 국내정치·사회의 안정회복등 경기를 자극할 호재는 많았다. 이정도면 당연히 경제는 생기가 돌아야한다.
한데 실제는 그렇지않다.
봄과 더불어 부산해질것으로 예상했던 건축경기는 미동조차하지않고 시중 소비경기는 여전히 무기력하다. 기업은 투자를 늘릴 생각을 하지않는다.
명동 사채시장에도 이변이 생겼다.
돈을 놓겠다는 사람은 많이있는데 쓰겠다는 사람은 줄었다는 것이다. 한달 3∼4%였던 사채이자율이 요즘은 2·5∼3·5%선으로 떨어졌다.
사채이자율과 단자금리사이에 차이가 미미해졌다. 사채업자들 얘기로는 10년동안 처음보는 현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돈 흐름의 이상과 저조한 경기동향에 정부당국자들은 초조감을 느낀듯하다.
대규모 대환 및 3천7백억원의 시실자금 확대공급계획을 밝힌 이승윤재무부장관의 「4·3」발표는 그러한 맥낙에서 이해된다.
인플레 위협을 무릅쓴 통화공급에 의한 경기활성화-여기에서 정책의 딜레머를 읽을수 있다.
신병현부총리도 『현재의 통화공급은 과잉유동성상태가 아니며 통화환수대책을 쓸 필요성을 느끼지않고 있다』고 견해를 밝힌바 있다. 경제가 활발하지않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돈이 많이 풀린것은 아니지 않느냐하는 시각인것 같다.
근래 은행장실을 찾는 굵직한 기업가 손님들이 눈에 띄게줄었다고 한다.
그동안 기업의 양건예금(적금) 상계처리, 재고정리, 일부 수출경기의 회복등은 기업의 자금난해소에 기여한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아직도 만성적인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
어음부도율이 73년이후 가장높은 0·17%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기업의 자금지원 SOS가 줄어든것은 자금사정이 나아져서가 아니다. 투자 마인드가 냉각되어있기 때문이다.
기업인들끼리 만나면 있는것이나 꾸려가면서 편안하게 살자는 얘기를 백조하듯 주고받는 장면을 많이 볼수있다.
70년대초의 기업인들 얼굴에서는 「신데렐라」를 꿈꾸는 야심과 의욕을 읽을수 있었다.
일을 찾고 벌이려고 했다.
요즈음은 달라졌다.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있고 자신감이 없어보인다.
은행장실을 찾는 기업가가 줄어들고 돈을 풀어도 순환경기가 자극되지 않는 까닭은 바로 기업가들의 위축때문이 아닐까.
기업의 투자활동이 정체된다는 것은 경제성장의 정지를 의미한다.
최근 재무부가 투자촉진책을 서둘러서 발표한것은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기때문이다.
「4·3」 투자촉진 처방책이 얼마나 효과를 볼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주인은 투자마인드의 위축, 즉 심리적인데 있는데 그것을 자금공급으로 해결해보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병은 원인처방을 해야한다. 기업인들의 의욕을 고취시키고 자본주의의 확신을 심어주어야한다. 그렇지 않고는 『뭣하러 고생하느냐』는 회의적자세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바로 정책수단으로서의 돈의 한계가있는 것같다.
경제가 잘 되려면 돈이 가야할데로 가고 물 흐르듯 원활하게 순환해야한다.
마치 인체속의 피처럼.
가계의 여유자금은 은행저축으로 흘러들어가고 그것은 기업의 생산자금으로 공급되고….
한데 요즈음은 기업의 생산자금 또는 투자재원으로 쓰이기보다는 채무상환자금으로 쓰이거나 사채나 단자시장을 찾아 옆길로 빠지는것이 보통이다.
많은 돈이 풀렸는데도 통화공급이 적은듯이 얘기가 나오는것은 이러한 통화흐름의 파행성을 간과한 때문이다.
작년12월 한달동안 1조1천억원, 지난 1·4분기중 약1조2천억원, 이정도로 통화가 공급됐으면 결코 적은것이 아니다.
경기가 침체되고 투자가 부진해서 돈이 많지않은 것처럼 보일뿐이다.
어느순간 투기의 바람만 일어난다면 돈이 얼마나 많은가를 실감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잠복해 있을뿐이다. 속으로 인플레병을 키우면서-.<이제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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