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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의 최후 보루…어제와 오늘(중)|법률과 양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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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법관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판결문을 통해서 말할 뿐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내려오는 법언(법언)이다. 법관이 얼마나 어려운 자리인 가룰 설명해 주는 말이다.
전통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알려진 영국에서는 수상이 지나가면 앉아 있어도 법관이 지나가면 모두 일어서서 깍듯이 모자를 벗는다고 한다. 그만큼 「독립된 법관」의 위엄은 사회의 존경과 신망 속에서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지금은 상당히 나아졌지만 박봉의 격무에 시달리면서 법관은 유형·무형의 외부작용에 대처해야하는 어려움도 함께 겪어야했다.

<권총 뺏고 으름장>
법원이 외부의 작용을 겪었던 첫 케이스는 49년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가인 김병노 옹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압력을 받았던 것을 손꼽을 수 있다. 당시 가인은 친일파를 처벌하는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의 재판부장으로 있으면서 친일경찰 간부 최모씨 (당시 서울시경 사찰과장)를 구속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됐다.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당시 이 대통령은 가인에게 최씨를 풀어주도록 요구했다.
당시만 해도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경찰은 최씨룰 석방하지 않으면 실력으로 탈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급기야는 특검부장 권승렬씨 사무실에 몰려가 호신용 권총을 빼앗고 사무실을 폐쇄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했다. 그러나 가인은 끝내 이에 굴하지 않고 초심을 관철했다. 이 때문에 이 대통령은 반민특위활동의 중지를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건국 후 행정부에 의한 사법부의 첫 수난이었다.
가인은 이때 몸져누운 후 지병이 악화돼 결국 다리 한쪽을 잘라내고 의족을 썼다.
대법관을 지낸 김갑수 변호사는 『의족과 지팡이에 의지한 그의 모습은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여 한국의 사법부룰 상징하는 듯했다』고 술회하고있다.
법관에 대한 압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경우도 많다.
과거 어느 대법관은 『사법권의 독립은 권력에서의 독립뿐만 아니라 금력· 여론으로부터의 독립도 돼야한다. 나의 경험으로는 여론으로부터의 독립이 가장 어려웠으며 간섭이 제일 심한 것도 여론이었다』면서 여론의 갈채가 반드시 정당한 판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데서 법관은 고민한다고 했다.
부산피난시절에는 서민호 의원이 서 모 대위 살해혐의로 구속됐으나 국회의 의결로 법원이 서씨를 석방하자 소위 「땃벌떼」「백골단」 등 깡패집단이 법원에 난임, 『담당 안윤출 판사측이라』고 소란을 피웠다. 또 경남지역에 계엄이 선포되고 서씨 사건은 군법회의로 넘겨져 사형이 선고된 후 계엄이 풀렸다.
한 사람의 법관 때문에 계엄이 선포됐으니 법관에 대한 압력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미루어 짐각할 수 있다.
4·19 직후에는 공주의 어느 촌로로부터 자유당 말기에 접수한 경향신문 무기점간사건을 미루었다하여 대법관 전원이 고소를 당하는 등. 이색적인 수난을 겪기도 했다.
제3공화국에 들어 사법부와 행정부의 마찰은 71년6월22일의 「국가배상법」「법원조직법」에 대한 대법원의 위헌판결로 요약될 수 있다.
내용은 국가배상법 (제2조1항)의 『군인·군속은 국가에 대해서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 는 단서가 헌법 제26조 (국가·공공단체의 배상책임)에 위배된다는 것.

<위헌판결로 수난>
당시 이에 관한 사건이 1천여 건이나 소송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이 판결로 연간 50여억원의 배상예산이 별도로 마련돼야 하는 실정이었다.
또 하나는 당시 6대 국회가 법원조직법을 고쳐 위헌심사의 대법원판사 정족수룰 「대법원판사 3분의2 이상의 출석과 3분의2 이상의 찬성」으로 강화한 것을 위헌이라 판결한 것.
이 판결이 나자 사회에서는 『헌법의 수호자, 사법권의 우위를 내세운 헌정사상 획기적 판결』이라고 평했고, 법조계에서는 『사법부 독립의 자구선언』 『국민 기본권 보장의 역할』이라고 대법원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행정부와 상치된 견해의 이 판결은 결국 1개월 후 터진 「사법파동」의 불씨가 됐다고 같은 해 7월26일 『변호사로부터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검찰이 현직 부장판사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자 전국의 법관들이 사표를 내고 반발했던 것.
이때 법관들은 소위 「압력7개항배격」울 들고 나와 항간에 떠들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압력이 처음으로 법관들의 입으로 노출됐다.
건국이래 압력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법관들의 피맺힌 절규였다.
법관들은 비교적 금력에 대해선 갈 견디는 편이었다. 대법원 판사·대법관들은 일제하에서 일본법관의 청교도적 강직성에 영향을 받아 더욱 그랬다.
법무장관을 지낸 애산 이인 옹은 부산 피난 중 일본의 사법제도 시찰을 갔을 때 무엇보다 감명 깊었던 것은 최고재판소장 (대법원장) 전중경대낭씨의 옷차림이었다고 생전에 술회했다. 이 때 전중 박사는 해진 구두와 양복차림으로 애산 일행을 맞이했던 것.

<생계 어려워 사임>
김세완 대법관은 대학에 입학할 때 사신은 목 높은 구두를 판사 시절에도 계속 신었고 다 떨어지자 실내화로 바꾸어 신고 다닌 뒤 정년퇴임 기자회견 때 이 구두를 보여주기도 했다. 5년5개월간 대법원 판사를 지낸 주운화씨는 69년8월 갑자기 사표를 냈다.
이유는 당시 봉급 14만원에서 공제액을 빼면 8만원 정도 남는데 이것으로는 4남3녀의 교육비 등 도저히 생활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8년3개월간 대법원판사로 있었던 최윤모씨도 같은 이유로 법복을 벗었다.
이영섭 전 대법원장이 7O년대 초 대법원판사로 있으면서 서울강서구목동 국유지룰 불하 받아 집을 지었다. 이때 호화주택으로 잘 못 알고 사진을 찍으러 갔던 당국자들이 나물 보퉁이룰 머리에 인 채 「몸빼(여자바지)」를 입고 귀가하던 부인을 보고는 송구스런 표정으로 돌아왔다는 일화도 있다.
화려하지 앉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이처럼 가족 등 사생활의 희생을 감수하는 경우는 허다했다. 그러나 이런 법관일수록 재판에는 철저해 타협이 안 통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이런 법관일수록 후배법관들을 친자식처럼 무섭게 가르쳤다. 이것을 노 법관들은 뿌듯한 긍지요 보람으로 느끼고 있다.
최근 1∼2년간에 법관들의 대우도 많이 나아져 옛날 같은 일화는 찾기 힘들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해도 『법관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해서 재판해야 한다』는 말은 영구불변의 진리임에 틀림없다. <권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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