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083)제73회 증권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애국복권>
이제 복권이야기를 해야겠다. 요즈음도 일반에게는 증권보다 복권이 더 친숙하고 복스러워 보이거니와 특히 필자에게 복권은. 더 자세히 말해 애국복권은 남다른 추억을 불러 일으킨다.
피난시절 뱃고동소리가 멀리 들리던 부산극장무대. 가수 김정구씨의 구성진 『두만강 푸른 물』. 마이크 잡고 사회 보던 필자. 해외연수여행 등등.
모두 애국복권과 함께 얽힌 잊을 수 없는 슬라이드들이다.
6·25당시 정부가 애국복권을 발행한 것은 전시재정을 꾸러나가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1·4후퇴 후 재무부는 전비조달을 위해 건국국채의 발행은 물론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금조달에 급급했다.
이에 따라 백두진 재무부장관의 진두지휘아래 「백재정」이라 하여 모든 재정금융정책은 전비지원에 집중되었으며 각 부서에서는 어떻게든 시중의 자금을 끌어내기 위하여 밤낮으로 머리를 짜내야만 했다.
당시 필자가 몸담고 있었던 증권 부서는 건국국채의 발행, 지가증권매매를 중심으로 한 증권업의 감독만으로도 몇 안 되는 직원들이 눈코 뜰 새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좀더 효과적인 자금조달책을 궁리하던 차에 어느 날 일본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당시 전후복구를 위해 안간힘을 쓰던 일본이 「보くじ」라는 일종의 복권을 발행해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자유중국에서도 대만으로 쫓겨간 후 재정자금조달을 위해 발행한 「애국장권」이 성공적으로 잘 소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다음날 필자는 바로 송인상 이재국장의 방문을 노크했고 송국장은 그 자리에서 OK·곧 애국복권법을 입안하여 국회에 제출했더니 원안대로 통과되었다.
요즘 같으면 사행심의 조장이라는 이유 등으로 당연히 논란의 대상이 되었겠지만 애국복권이라는 이름도 이름이려니와 당시의 여건상 복권발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다음에 남은 문제는 현금을 다루는 일인만큼 공신력 있는 취급기관을 선정하고 어떻게 하면 국민들의 호기심을 최대한으로 불러 일으켜 복권발행의 효과를 극대화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애국복권을 취급하겠다고 나서는 기관은 많았으나 무엇보다도 공신력이 중요하므로 당시 지가증권의 보상업무를 맡고있던 식산은행 증권부에서 복권발행업무도 담당하도록 낙착됐다.
복권의 발행방식에 대해서는 일반 대중의 호기심과 직결되는 것이므로 많은 논의가 있은 끝에 요즈음의 주택복권과 같이 일정기간 판매한 것을 한꺼번에 공개추첨 하는 「개봉식」복권과 그 자리에서 뜯어보고 상금을 타가는 「피봉식」복권의 두 가지로 발행하기로 했다.
개봉식은 주로 식산은행창구를 통해 팔았고 피봉식은 오락장 등에서 상품용으로 소화했다.
인기로 말하자면 속전속결주의인 피봉식이 단연 높아 후에 피봉식 복권발행을 전담했던 애국보복회가 소화해낸 액수만 해도 당시 돈으로 3억원이 넘을 정도였다.
9·28 서울수복 후에도 애국복권은 계속 발행됐고 다만 식산은행이 산업은행으로 개편됨에 따라 취급기관이 조흥은행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필자 개인으로 볼 때 지금껏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부산시절 매달1회씩 가졌던 공개추첨행사였다.
주로 부산극장에서 무료로 관객들을 끌어 모아 김정구씨 등 당대 일류급 가수들의 노래를 곁들여 피난의 설움도 달래가며 공개추첨을 했는데 특히 진행상 필자가 직접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던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이렇듯 애국복권이 히트하자 심지어는 복권으로 긁어모은 돈의 쓰임새가 수상하다는 투서가 날아들었다.
결국 당시 장택상 총리의 특명으로 특별감사반이 편성돼 복권수익금의 용도 등에 대해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별다른 하자가 나올 리 없었다.
도리어 백 장관과 송 국장은 건국국채와 애국복권이 성공한 것은 필자의 공이라 하여 선진국가의 증권제도를 연구·시찰하는 특별 보너스 해외여행의 기회를 주었다.
당시 석산은행 증권부 차장이던 홍승두씨와 동행했던 해외나들이 길에 일본 등 동남아 각국을 돌아보며 오랜만에 머리도 식히며 증권에 대한 견문을 넓혔음은 물론이다.
애국복권은 57년까지 발행되어 그 전액이 소화됐는데 그후 재정 형편이 다소 호전됨에 따라 건국국채와 함께 폐지되었다.
복권을 발행하려는 시도는 그후에도 있었다.
황종률 재무부장관 재직시절이라고 기억되는데 당시 황 장관은 단기재정증권형식으로 복권을 발행하겠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그러나 발표가 나오자마자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도 사행심을 조장한다하여 이룰 반대했고, 특히 당시 모든 언론기관의 호된 비난을 받아 결국 발행계획은 취소되고 말았다.
필자는 당시에도 애국복권의 성공과 외국의 예 등을 들어 장덕진 이재국장에게 복권발행을 적극적으로 건의하는 입장이었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해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주택복권이 다시나와 결국 복권제도를 부활시킨 셈이 되었으니, 어떤 법이나 제도든 그 당시 사회의 필요에 따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버려지기도 하는 것이라 다시 생각해 보면 별로 서운할 것도 없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