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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미볼 태국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태국의 3일천하로 끝난 쿠데타 진압은「프렘」수상정권의 승리 같지만 그 배후엔「부미볼·아둘라데」국왕이 있다.
「부미볼」국왕의 공식명칭은「라마」9세. 그는 「타이」국민들로부터 『신과 같은』 숭앙을 받는다. 국민들은 지금도 그를 알현 할때 극도의 경외심을 나타내려고 『폐하의 발아래 있는 먼지』라고 자기를 비하한다.
그는 보통 정치에 초연한 입장을 지져왔다. 상징적인 국가협력의 대표자이니까 그건 당연한 것일수도 있다.
1932년 6월24일의 쿠데타로 태국의 절대왕권은 이미 끝났다. 하지만 형의 급사로 1950년 즉위한 그는 농민을 중심한 대중의 폭넓은 지지기반 위에서 국민단합의 구심점이 되는 특이한 역할을 하고있다.
이번 쿠데타진압에서도 그는 천군만마의 위력을 보였다.「산트」의 혁명군이 수도「방콕」을 점령하고 모든 국가협력을 장악했지만 쿠데타는 실패로 끝난 것이다.「부미볼」국왕이 「프렘」과 함께「방콕」 이 아닌 「코라트」기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태는 역전된 것이다. 국왕이 지지하는 합법적정부가 어느 쪽인가가 분명해진 때문이다.
「부미볼」국왕은 종래 정치에 초연하던 입장을 떠나 이번 사태에 매우 중요한 정치적 선택을 하고있다.
국왕은 방송성명으로 쿠데타를 간접 비난했다. 『모든 쿠데타는 국가안전·전국민의 평화를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으나 진실이 무엇인가는 생각할 일이다』라고도 했다.
전통적으로 국정문제에 나서지 않기로 유명했던「시리키트」왕비도 두 번씩이나 혁명군을 『독재음모』라고 비난했다.
국왕부처는 쿠데타진압에 일심동체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들의 명성은 세계적이다.
「부미볼」은 스포츠맨이자 음악가로도 이름 높다. 태국에서 제일 큰「출라롱콘」대학의 교가도 그의 작사작곡이며 피아노솜씨도 일가의 경지에 이른것으로 알려져있다. 67년 동남아요트선수권대회에 출전해서 우승하기도 했다. 「시리키트」왕비는 동양적 우아미와 세련된 매너로 세계의 베스트 드레서가 된적도 있다. 그 때문에 한때 태국에선 유행을 만드는 여성이란이야기도 나돌았다.
국왕부처가 늘 순탄한길을 걸어온 것은 아니다.
77년9월 지방순례중에 사제폭탄에 피습된 적도 있었으며 장녀「우볼·라타나」공주가 혼혈아와 결혼해서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하지만 「부미볼」국왕은 이번 쿠데타진압으로 국민단합의 상징이며 구심점임이 분명해졌으며 명예롭게 국가원수자리를 지킨 인물이란 평가를 받게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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