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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계의 화단」에 점철하는 꿈과 좌절「파리」의 한국인 미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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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50, 60년대만 해도 한국화가가「파리」에 온다는 것은 무척 힘들고 드문 일이었다. 절차도 까다로웠으려니와 물질적·정신적 뒷받침이 약해 섣불리「파리」행의 꿈을 실현하려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렇던「파리」에 요즘은 한국인 미술가만 60여명이 모여 저마다 창작활동과 예술수업을 받고 있다. 그들이「파리」에 와서 과연 무엇을 하며 어떤 결실을 얻어 가고 있는지는 다른 일면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겠지만 우선 이만한 숫자가 미술의 본고장이라고 일컬어지는「파리」의 숨결을 호흡하고 있다는 것은 거시적 관점에서 한국미술의 발달에 지대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온 누구도 부인 못할 것 같다.
4만여 명의「파리」체재 외국화가 중 1천2백 명이 일본인이라는 것과 비교한다면 아직 한국화가들이「커뮤니티」를 형성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경노·이성자씨가 명맥을 유지했던 지난날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아무튼「파리」는 이제 한국인에게 낯설지 않은 도시임에 틀림없다. 영주권을 얻은 교민은 3백6명에 불과하지만 일반체류자가 l천3백16명이나 되고 한국식당만도 9개나 성업중이다. 교민이나 체류 자는 모두 다양한 직종을 갖고 있어 굳이 특징을 발견하기 어렵다.
「파리」의 한국화가들은 두 가지 활동유형으로 구분된다. 한「그룹」은 국내에서 대학이나 고교에 상당기간 교편을 잡았거나 작품활동을 함으로써 지명도회 얻어 기성화가가 되어 온 사람들이다.
또 한 부류는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국내 화단에 미처「데뷔」할 틈도 없이 도불해「프랑스」대학에서 수학을 연장하고 있는 사람들.
이중 국내화단에서는「재 불화가」로 손꼽히고「파리」화단에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대표적인 사람은 이성자씨(63)와 김창렬씨(51).

<영주 교민 3백6명>
이성자씨는 금년 여름 체불 30주년 기념전시회를 준비중인 고참으로서 계속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이미 30회 이상의 개인전과 1백 회 이상의 합동전회 기록하고 있는 이씨는『작가가 늙음을 느낀다면 이미 생명을 다한 거나 다름없다』며『나이가 들수록 작품경향이 정열적으로 되어 간다』고 했다.
「물방울」작가로 불리는 김창열씨는 최근「뉴욕」에서 개인전을 가진 것을 비롯해, 서울「파리」등지에서 모두 27회의 초대전과 개인전울 열어 국제 급 화가로서의 튼튼한 기반을 다져 가고 있다.
김씨는「파리」화단이「뉴욕」화단과 다른 점은 3백 개 이상의「살롱」(화랑)이 집중되어 있고 이들「살롱」들이 외국 화가들에게도 비교적 쉽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바로 이점이「파리」가 세계 각국의 미술가들을 끌어들이는 원동력이다.
이밖에도 한 묵 김기찬 정상화 정문규 손동진 이항성 강정완 이자경 오천룡 김인중 신성희 김정환 진유영 백영수(이상 서양화), 권영우(동양화), 박충흠 이종학(이상 조각)씨 등 이「살롱」전을 갖고「파리」화단에 선을 보였다.
한국화가들이 기성·신인을 가리지 않고 기를 써서「파리」에 오는 이유는 전시회를 겸해 국제무대에서 자기 역량을 평가받아 보겠다는 것과 새로운「테크닉」또는 세계조류를 배워 가겠다는 일념 때문이다.
전시회는 이곳 화랑의 초청을 받아 여는 방법과 자기 돈으로 화랑을 대관 해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화랑의 초대를 받아 개인전을 하면. 자기 돈이 한푼도 안 드는 것은 물론 선전을 화랑 측이 담당하기 때문에 관람객도 몰리고 그림이 팔리는 확률이 높다.
화랑 중에는 작품을 공모해 초대전을 주관하는 예도 있지만 대부분의 화랑들은 각종「채널」로 유망주를 발굴해 전속계약을 맺어 화가를 키운다.
세계의 그림 값을 좌우하는「파리」의 화랑들은 이름난 작가도 꼭 확보하고 있지만 재능 있는 무명의 인재를 발굴해 내는 높은 식견을 갖고 있다.

<초대전 참가 어려워>
명화 상들이 운영하는 권위 있는 화랑일수록 대관전시회는 하지 않으며「프랑스」정부는 이들의 초대전에 처음 참가하는 외국화가의 작품은 꼭 한 점씩 사서 문화성에 보관한다.
한국화가들 중 초대전을 통해「파리」화단에 등장하는 사람은 10명중 1, 2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8, 9명은 대개 2주일에 1천∼1만「달러」씩을 내고 대관전시회를 갖고 돌아간다. 한국화가들이 애용하는 전속 대 관장은 두 개. 대관전시회에는 한국인 관람객 몇 명이 모이는 것이 고작인데 이들의 성과는 국내에서 침소봉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실 한국화가들이 이같이 허욕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몸은「파리」에 와 있건만 마음은 국내화단의 그림 값에 가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파리」의 그림 값이 서울에 비해 엄청나게 싸 다는 것이 재 불 화가들의 공통된 고백이다. 때문에 한국화가가「파리」에서 그림을 팔아 생활한다는 것은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이며 이경노·이성자·김창렬씨 정도가 그나마「그림」으로 지탱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기성화가들은 서울에서 돈을 가져와 일정기간 쓰고 가는 형편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서울에서 누구누구의 도불 전·귀국전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관찰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중에는「프랑스」정부의 적극적인 예술지원책의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도 있다.
「프랑스」정부는 모든 신규건축물의 공사비 1%를 미술가들을 위해 쓰도록 법제화하고 있다.
때문에 새「아파트」가 서면 반드시 꼭대기 층에「아틀리에」가 몇 개씩 할애되는데 여기에 입주하는 미술가는 시중 임대료의 4분의 1이라는 헐값에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성자·이항성·이자경·오천룡·강정완·정보원(조각)·김기린씨 등 이 이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다.
이밖에 일부는「아파트」나 사무실의 벽지 바르기·「아파트·페인팅」·무대장치·고화 표구 등 전공과 관련 있는「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를 충당한다.

<국내전시회에 기대>
비록 고생을 하더라도 많은 재 불 화가들은 일찍이 맛볼 수 없던「파리」의 예술향취를 직접 체득할 수 있다는데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들에게는「루브르」박물관·「퐁피두」문화「센터」·국립현대미술관·「파리」시립현대미술관·인상파미술관 등에 진열된 무궁무진한 보고를 접한다는 것이 바로 공부요,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의미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질적인 분파주의로 상호 융화가 안되고 있는 것이 큰 흠이기는 하지만 남 관·박서보·변종하·권옥연·문 신·이세득씨 등「파리」를 거쳐간 거목들이 국내화단에서 받는 명망이 후학들에게 자극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글=전 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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