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063)제73화 증권시장(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증시의 소사>
증권시장을 일컬어 자본주의경제의 꽃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우리의 증권시장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좋은 편이 못된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아직도 직업적인 투기놀음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간의 공과야 어찌되었든 이 땅의 자본주의 역사와 함께 뿌리를 내린 증시도 이제 성년을 바라보게 되었다.
구한말 미두시장서부터 거슬러 증시의 소사를 정리해 본다.
자본주의의 도입이 그렇듯이 증권시장이 시작된 것도 일본인의 손에 의해서였다.
당시의 경제형편으로 미루어 지금과 같은 주식이 거래될 리 없었고 논에 심겨져있는 쌀이나 대두를 대상으로 흥정을 벌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처음에는 일본거류민들이 쌀을 자기네 나라로 보내기 위해 비공식적인 거래를 벌여왔으나 규모가 커지자 1896년 인천에 미두취인소를 세운 것이 우리 나라 증시의 효시였다(취인소란 일본말로 지금의 거래소에 해당한다) .
우리 경제를 근대화시켜 준다면서 세운 식산은행이 약탈의 앞잡이 노릇을 했듯이 증시의 시작도 우리 나라 쌀을 가져가기 위한 방편이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우리입장에서는 취인소 설립에 적용할만한 관계법규도 없었고 전문지식도 없었던 터였으므로 모두가 일본법규·일본인에 의해서 움직여 나갈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쌀 이외에도 콩·명태·석유·방적사·목면 등 많은 물건들이 현물로 거래되었으나 점차 쌀 하나로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본격적인 증시모습을 갖추어나갔다. 우선 실물거래가 줄어들고 소위 장기청산거래가 주류를 이루었다.
가령 가을 추수를 앞두고 수확을 미리 예상해서 매긴 가격으로 서로 팔고 사서 추수 때 가서 차익을 챙기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에 대한 예측력이 필요했고 잘만 들어맞으면 간단히 일확천금을 누릴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증권의 묘미인 투기라고 하겠으나 도가 지나쳐 부도사태가 남발되었고 인취는 결국 개장 2년만인 1898년 일본외무성으로부터 해산명령을 받아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애당초 일본인의 이익을 위해 세워졌던 만큼 이듬해부터 다시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인취가 재출발하자 이미 투기에 맛을 들인 전국의 거상들이 인천으로 몰려들었다. 동경이나 대판에 견줄만한 호황을 누렸다. 인취가 재미를 보자 부산·군산·목포등 쌀 산지와 항구가 연접해있는 지역에서도 거래소 설립을 줄기차게 교섭했었으나 일본총독부는 투기조장이라는 핑계로 들어주지 않았다.
따라서 유일한 시장인 인취는 날로 번창해갔고 투기 또한 더욱 기승을 부렸다. 이즘에는「사자」와 「팔자」가 현금과 현물을 주고받는 현물시장은 이미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모두가 장기청산거래였다.
물건값의 20%만 돈을 내면 물건을 살 수 있었고 당한·중한·후한이라고 해서 3개월까지 결제 일을 정해 매일 매일의 시세변동에 따라 되팔 수 있도록 했다.
쌀 하나로 거래가 이루어졌던 것도 주곡인데다 수확기간이 길어 투기의 여지가 그만큼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같은 투기바람은 급기야 인취의 파산위기로까지 몰고 간 때도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던 1919년에는 혹심한 불황으로 곡물 값이 연일 폭락을 거듭하게되자 곳곳에서 부도사태가 일어났고 당시 집계된 부도총액은 1백82만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결국 총독부는 인취의 파산을 막기 위해 인취의 자본금 1백만원과 유보해 두었던 적립금을 풀어 수습에 나섰었다.
어렸을 때 기억으로도「미두」하면 투기의 대명사처럼 쓰여졌었으니 얼마큼 인취의 투기가 심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인취의 거래원수는 30명 정원으로 되어있었으나 실제로는 10∼20명 선에서 유지되었고 일본인이80%를 차지했다.
한국인 임원은 장두현씨가 이사를, 이병학씨가 감사를 각각 맡았고 당시 이름을 날린 투자가로는 김인오·조준호·강익하 등이 알려져 있다. <계속>

<필자 이현상씨>건국 때 증권관계법규 입안
이현상씨는 건국당시 재무부관리로 증권관계법규를 직접 입안했으며 증권거래소를 비롯한 각 증권기관의 산파역할을 해왔다.
미「조지타운」대학에서 증권시장을 전공했으며 식산은행을 거쳐 증권거래소의 조사부장·상무·전무를 끝으로 증권계를 떠나 지금은 삼진「알미늄」감사로 있다.
이씨는 이론뿐 아니라 5·16이후의 증권파동 등 우리 나라 증권계의 대소사를 몸소 겪은 증인이기도 하며 한때는 경향신문의 경제담당 논설위원을 지냈다.
저서로는 『증권시장해설』과 『한영증권용어사전』등을 펴냈다. (57세·서울 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