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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정치능력 높이평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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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세계여론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영국의「런던·타임즈」(현「더·타임즈)와 미국의「뉴욕·타임즈」는 우리의「3·1 독립운동」을 어떻게 취재, 보도했으며 관심은 어떠했는가를 62년이 지난 지금 살펴보는 것은 퍽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19년 3월1일 「독립만세」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올려 퍼진 이래 이해 8월까지 영국의 대신문「런던·타임즈」는 「기미독립만세」에 관한 기사를 6건, 「뉴욕·타임즈」는 25건을 보도했다.
「뉴욕·타임즈」는 관심도가 윌등히 높아 독립선언문을 전문번역해 이해 6월15일자에 전문게재한 것 외에 두번에 걸쳐 사설로까지 다루었다(3월20일과 4월24일자).
이들 양대신문의 초기의 보도는 주로 상해와 북경에서 송고된 간접 취재기사와 동경에서 발행되는 일본신문의 용약기사 아니면 재미 한국독립운동단체가 발표하는 성명서에 주로 의존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재한 미국인 선교사들이 일본검열당국의 눈을 피해 외부로 흘려보낸 각종 보고서, 미국·중국대륙에 있는 우리 독립단체들이 발표한 성명서가 보도되면서 일제의 잔학한 시위 탄압 수범들이 적나라하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런던·타임즈」가 최소한의 사실보도에 그쳐 공정성을 지킨 반면 「뉴욕·타임즈」는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사설에 나타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입장은 친일목적이고 한국민족에 대해 근본적으로 편파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사실보도에 있어서는 두신문이 「3·1운동」의 무저항성을 처음부터 강조해서 일본의 비인도적 탄압방법을 더욱 비판적인 각도에서 부각시켰고 거국적 저항운동을 비밀리에 조직, 실행하고 있는 한국인의 독립운동 능력을 극히 호의적으로 기구했다.
한국인이 자치능력이 없다는 구질로 한우도 식민화를 국제사회에서 정당화시키려한 일본당국에 대해 이러한 보도내용은 큰 파문을 일으켰을 듯 하다.
「3·1운동」의 첫 보도는 1919년 3월13일. 「뉴욕·타임즈」 3면에 실린 『한국인들 독립을 선언하다』라는 제목의 1단기사였다. 이 기사는 수천명이 시위하다 일경에 검거된 사실과 평양에서 일경들이 시위학생들의 옷을 벗겨 나무십자가에 매달고 『너희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듯이 너희들도 십자가를 메라』고 폭언한 사실이 주요 내용이었다.
곁들여 독립관서문 요지가 북경발로보도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첫기사에 『건국의 일본인들이 가담한 듯』이라는 귀절이 있어 「뉴욕·타임즈」의 편집기자들이 독립을 부르짖는 한국인과 이를 억압하는 일본인을 혼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다음 기사부터는 그런 혼동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린던· 타임즈」는 「뉴욕·타임즈」보다 6일 후인 19일에야 첫 보도를 했다. 상해·「오오사까」(대판)·「도오꼬」(동경)발「로이터」통신 종합으로 된이 첫 기사는 「파리」평화회의에서 한국 독립이 공식으로 승인된 걸로 오해한 한국민중들이 미·영·「프랑스」영사관 앞에 몰려와 시위를 벌이다가 상당수의 사상자룰 냈으며 지방에도 시위가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하고 서울발 기사는 금지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경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도는 처음부터 눈에 띈다. 「뉴욕·타임즈」는 15일 북경발기사에서 현지 한국독립단체 대변인의 말을 빌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한 손에 치켜들고 시위하던 한 소녀의 손목을 일경이 칼로 잘라버리자 이 소녀는 다른 손으로 선헌문을 다시 치켜들었다.
일경은 이 손마저 잘랐다』고 보도했으며, 18일에는 서울의 한 미국 선교사의 말을 인용한 북경발 기사에서 『일경은 마치 독일 병사가 「벨기에」에서 한 잔학행위를 본받은 듯 만세 부르는 연약한 여인과 아이들까지도 때리고 차고 칼로 찔렀다』고 보도했다. 서울 남쪽의 한 마을에서는 기독교도들이 앉아있는 교회(수원 제암리교회지칭)을 불태우고 모두 사살했다는 사실도 보도했다.
특히 4월17일자「뉴욕·타임즈」3면에 보도된 기사는 현장의 절박감을 처절하게 전하고 있다. 한 선교사가 미국정부에 보낸 보고서를 인용한 이 기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일경은 무저항 군중들에 무자비하게 발포해 수십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했다. 교회는 파괴되고 여학생과 청년들이 감옥에 끌려가 매를 맞고 고문당했다. 평양에서 내가 목도한 만행은 이루 필설로 표현키 어려울 정도다. 두 처녀가 머리채를 잡혀 끌려나갔는데 일경은 이들을 전신주에 결박하고 무수히 구타했다.』
「3·1운동」에 대한 일본·미국·영국정부의 입장도 흥미롭다. 3얼13일 「뉴욕·타임즈」지가 동경발로 보도한 기사는 일본정부가 공식발표를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이번 시위는 「불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는 한국교포가 한국에 「볼세비즘」(공산주의)을 전파하고 이어 이를 일본까지 퍼뜨리려 했기 때문에 악화됐다.』
3월14일 미국무생의 발표문은 『시위는 3월12일로 끝난 젓 같다. 시위 가담자 중 기독교도는 15%뿐이다. 이 시위의 목적은 언론의 자유, 청원권 인정, 학교내에서 한국어사용 허용 등이다』라고 독립운동을 그 내용별로 세분함으로써 이를 과소평가하려는 눈치가 뚜렷하다. 그 이후도 오랫동안 시위가 계속된 것이 「뉴욕·타임즈」지에 계속 보도되어 미국무생의 발표가 얼마나 편파적인지를 드러냈다.
영국에서는 7월8일 외상이 의회에서 질문에 답변한 내용중 「3·1운동」에 관한 언급이 다음과 같이 보도됐다.
『일본당국은 시위를 격렬하게 막았지만 기독교도들이 이 운동을 시작했다는 증거는 없고 일본이 특히 기독교도들을 탄압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한 영국선교사가 한국인들과 같이 있다가 심한 구타를 당했는데 일본정부는 즉시 조사한 후 사과의 뜻을 표하고 보상금을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전해왔다.』
각국 정부가 이처럼 냉담함 가운데 이름이 밝혀지지 중국의 한국독립운동가들과 「워싱턴」의 이승만박사 및 「헨리」정이란 인물은 여론을 「3·1운동」에 유리하게 돌리려고 동분서주한 흔적이 지면마다 엿보인다.
「3·1운동」의 성격이 무저항운동인이상 그 성과는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능력을 최대한 알리는데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잘 깨달았었음을 엿볼 수 있다.
3월19일자 「뉴욕·타임즈」는 「한국에서 방금 북경에 도착한」한 선교사의 말을 인용, 『이 운동은 역사상 가장 경이로운 비무장저항운동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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