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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고 또 뛴다|해외에서 활약하고있는 체육인들<6>|대만실업 농구 아동팀 코치 주희봉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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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주희봉씨(35). 웬만한 농구「팬」이면 그의 이름을 잊지 않고 있다. 정년 제5회「체코」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소련에 이어 감격의 준우승을 차지할 때 박신자·김추자·김명자와함께 맹활약한 주역으로 기억을 새롭게 하고 있다. 이러한 주씨가 국내무대에서 슬그머니 사라진지8년이 됐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자유중국의 유수한 농구지도자로 성장, 명성이 드높은「코리언」으로 활약이 두드러진 맹렬 여성이 됐다. 특히 자유중국 농구계에선『주희봉이 가는 곳에 우승이 뒤따른다』는 말이 들고있다.
자유중국에 간 첫해인 74년12월 약체 아동「팀」의「코치」로 부임한 뒤 이「팀」을 1년 만에 우승「팀」으로 이끌면서 그는 농구계의 명사가 됐다. 그러나 그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한 것은 초년 중화항공「팀」으로 옮겼을 때다. 그는 또 다시 1년 만에 이「팀」을 정상에 올려놓아 지도자로서의 신망을 두텁게 한 것이다. 그는 79년에 다시 아동「팀」으로 들어왔다. 아동이 상위권에서 밀려나자 궁여지책으로 그를 초빙한 것인데 묘하게도 아동은 그가 오자마자 또다시 패권을 차지했다. 현재 자유중국여자실업「팀」은 아동을 비롯, 중화항공·국태인?·대만전력·대원·대만전신·남아(조량숙과 전경숙이 최근입단)등 7개「팀」이다.
그러나「코치」로서의 역량이외에도 농구계뿐 아니라 체육계에서 그룰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자유중국과 한국의「스포츠」교량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유중국은 70년대에 들어 국제「스포츠」사회에서 점차 고립돼왔다. 이러한 때에 자유중국체육계는 한국과의「스포츠」교량역할을 하는 그를 새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숭의여고(64년졸)를 거쳐 제일은에서 활약하다 뒤늦게 한양대체육과에 입학(68년) 한 만학도이기도 하다. 그가 해외에서 나래를 펴게 된 것은 74년 8월「홍콩」정청의 체육교사 농구강습회 감사로 초청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홍콩」에서의 임무가 끝나자 이해 12월 자유중국으로 건너갔다.
조흥은행에서 잠깐 선수로 활약하다 중국인과 결혼한 후배 장설매씨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동「팀」「코치」를 맡게된 것은 72년에 대북에서 열린 제5회「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 대회에서 한국대표로 출전한 그의 활약이 눈부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대회에서 정확한 중거리「슛」으로 자유중국농구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그는 처음 여자라는「핸디캡」외에도 언어의 장벽으로 무던히 고생했다. 후배 장설매씨 집에 기거하면서 중국어를 익히고 농구를 가르치자니 어려움이 수없이 따랐다. 그러나 억척같은 성격을 소유한 그는 이같은 장벽을 넘어 이젠 중국어는 물론 영어도 잘 구사한다.
자유중국 여자대표「팀」감독을 역임했고 아동「팀」고문으로 물러난 탕명신씨(51)는 『처음 주양을「코치」로 기용할 때 농구계의 반발이 셈했었다. 그러나 약체「팀」을 우승 「팀」으로 이끌면서 모든 것이 순조로와 졌다』고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그는 지난76년 바쁜 중에도 대만사범대체육대학원에 입학했다.
오는 6월 졸업을 앞두고 석사학위 논문을 위해 지난2월초순 서울을 다녀갔다. 논문「테마」는『한·중 우수여자농구선수들의 기본운동능력과 기술분석비교연구』다. 서울에 왔을때 그는 내년에 출범하는 신용보증기금「팀」의「코치」로 와달라는 선배 박신자씨의 제의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내년부터『농구를 너무 사랑하다 결혼 못했다』는 주희봉씨의 국내「코트」에서의 활약매기대률 걸어 볼만하겠다.

<이민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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