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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대관령 설원서 황태가 익는다|평창군 도암면 북어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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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홍어는 썩어서 제 맛을 내지만 명태는 돌멩이처럼 얼어야 깊은 맛이 든다. 명태가 얼면 동태요, 동태가 익으면 황태. 해발 8백50m 고냉 지대에 위치한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는 국내 최대규모의 황태 건조장.
1만5천평의 덕장에 널린 5백만 마리의 동태는 영하15도의 혹한과 눈보라 속에서 긴 잠을 자고 차차 노르스름한 황태의 재 빛깔을 찾고 있다.
『명태 건조에는 비가 원수지. 비 맞으면 찐득찐득한「낀태」가 되불거든』
20년간 겨울을 대관령에서 명태와 살아온 유성준씨(55)는 기온이 너무 떨어지면 껍질색깔이 하얗게 바래「백태」가 되고 기온이 높으면 한꺼번에 수분이 빠져 바짝 마른「깡태」 가 된다며 명태론 일장을 편다.
명태 건조의 최 적기는 대관령 지방의 기온이 영하10∼15도로 떨어지는 12월초부터 1월 사이. 해마다 12월 초순이면 대관령 고개는 동해 명태를 그득 실은「트럭」들이 개미 행렬을 이루고 명태 덕장을 오르내리는 인부들로 고원한촌은 갑자기 왁자글스러워 진다.
이때쯤이면 주문진을 비롯한 일대 어항도 대관령 덕장으로 보낼 명태의 할복작업으로 어수선하게 돌아간다.
명태 알에 간간이 짠맛이 배어 익으면 명란젓이고, 곤지(창자)와 애(기름)로 젓을 담그면 바로 창란젓이다. 수백 명의 부녀자들이 흰 수건을 쓰고 일렬로 선창에 늘어서 재빠른 솜씨로 명태 배 가르는 광경은 일대 장관.
대관령에 도착한 명태는 계곡을 타고 흐르는 차디찬 얼음물에 비릿한 바다 내음을 말끔히 씻는다. 품위 있는 황태로서의 변신을 위한 긴 고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얼음물 속에서 하룻밤을 지낸 명태를 두 마리씩 짚으로 아가미를 꿰어 덕장의 고랑에 매단다.
참나무 원목을 가로세로 3층(약40m으로 엮어 세운 1개 덕장의 크기는 보통 2천5백여평. 1개 덕장에 5천 마리의 명태가 걸린다. 20여명의 인부가 달려들어도 1주일이 걸리는 대 역사다.
열병식이라도 한 듯 덕장마다 진을 친 명태는 막 벌린 입이며 툭 불거져 나온 눈이 성깔 깨나 있어 보인다.
1월초∼2월말까지는 건조시기. 이 기간에 비만 오지 않는다면 명태는 얼었다, 녹았다, 굳었다, 부풀었다 하면서 안으로 안으로 깊은 맛을 쌓아간다.
입춘이 지난 3월 초순이면 밀갈이. 밀갈이란 너무 낮은 기온으로 하달게 색이 바랜 불량품 백태를 황태로 만드는 작업. 덕장에서 내건 백태를 바람이 통하지 않게 밀착시켜 쌓아놓으면 서서히 노리끼리한 색깔이 되살아난다.
따스한 봄 햇살이 대관령 산허리에 내리쬐는 3월 중순부터 명태건조의 최종작업인 관태가 시작된다. 잘 건조된 황태 만을 골라 한 두름(20마리) 씩 싸리나무 꼬챙이에 꿰매는 게 관태.
『관태에 뽑힐 정도면 껍질을 벗겨 속살을 폈을 때 솜이불처럼 포시시 부푸는 것이 참기름 간장에 담그면「잉크」배듯 간장이 배들어야 하는 법이여.』
관태를 하는 3월은 이 고장 주민들에겐 수확의 계절. 덕장마다 흥겨운 잔치가 벌어진다.
텁텁한 강원도 옥수수 막걸리로 목을 추기고 잘 익은 황태 한 마리 북북 뜯어 입맛 다시며 한 겨우내 고생을 씻어버린다.
얼근히 취기가 오르면 떡 벌린 황태 입을「마이크」로 구성진 강원도 아리랑이 합창된다.
명태는 동해안 연안에서 잡아들이는 지방태와 북양산 냉 동태의 두 종류. 배양산은 덩치가 큰 대신 고기 맛이 싱겁고 동해명태는 짭짤하고 고소한 맛에 양념 흡수력이 강해 황태라면 동해안 지방 태를 손꼽는다.
이 고장에서 황태 건조가 시작된 것은 약20년 전. 원래 이북의 원산지방에서 건조된 동해안 명태를 제일로 쳤으나 해방후에는 대관령에서 익은 황태가 특유의 진미로 전국을 휩쓸고 있다.
올해는 10년만에 찾아온 동해안 명태풍년의 해. 이 마을 이장 권오균씨(45)는『새봄 식탁에는 싱싱한 산나물 무침에 모처럼 값싼 동해안 황태의 구수한 맛이 푸짐히 오를 것 같다』 면서 기뻐했다.
관태를 마친 황태는 4월 초순쯤 마지막으로 구멍갈이를 한다. 구멍갈이란 좀이 먹거나 벌레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건조작업.
수천 마리의 황태가 볕바른 양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것이다.
완전 상품화된 황태가 시중에 첫선을 보이는 것은 4월말쯤. 올해 황태 가격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배양명태가 한 두름에 5천∼6천원선, 동해안 명태가 3천원 선이 될 것이라는 게 현지 주민들의 예상.
해마다 명태 건조비와 인건비 등으로 이 마을에 떨어지는 수입은 4천여만원.
『쌀 서말 먹고 시집가는 처녀 못 보았다』는 건 옛말. 횡계리는 명태건조기가 지나면 고랭지에서 씨감자와 무·배추 등을 생산, 가구 당 3백50만원의 소득을 올리는 알뜰 부자마을이 되었다.
오금이 저리도록 매서운 혹한의 자연조건을 슬기롭게 이용, 부를 가져온 이 마을은 다가올 내년의 겨울이 즐겁기만 하다. <횡계=김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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