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카페] '영웅 시대의 빛과 그늘' 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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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시대의 빛과 그늘, 강남의 낭만과 비극, 제국으로 가는 긴 여정/박한제 지음, 사계절, 전 3권, 각권 1만3천8백원

"20세기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책 가운데 가장 많이 팔린 것이 이문열의 '삼국지'라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나로서는 이문열에 내 전공을 빼앗긴 피해 의식에 젖어들곤 한다. 전공을 찾아 당장 '박한제 삼국지'를 쓰고 싶으나 따져 보니 그럴 시기가 아닌 것이 분명한 것 같아 참기로 했다. 독자들이 '이문열 삼국지'에 식상할 시기가 대강 내가 교수직에서 정년할 즈음인 것 같으니…."(1권 76쪽)

박한제(57)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의 글을 읽다 보면 슬며시 배어나오는 미소를 참기 힘든 경우가 많다.

박교수는 삼국 시대부터 당대까지의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위진남북조 시대의 대규모 민족 이동이 호족(유목민)과 한족(농경민)의 융합을 이뤄내 수.당이란 제국을 건설하고 중국 문화의 다원적 성격을 형성했다는 '호한(胡漢)체제'학설로 주목받은 인물이다.

그런 그의 인간적인 글은 때로는 '개그 콘서트' 못지않은 재치를 발휘할 때가 있다.

이번에 나온 세권의 책에서만도 그런 명구들을 모으면 따로 책 한권이 나올 듯하다. 그러나 그런 작업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이 편안하게 읽히는 역사기행 에세이이면서도 우리 학자로서는 처음 쓴 위진남북조.수당사 개설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연구 업적을 오히려 가리는 결과를 낳을까 두려워서 그렇다. 이 책은 '월간중앙'에 연재됐던 에세이를 전면 재서술한 것이다.

부인에게서 역마살이 끼었다는 핀잔을 들어가며 방학 때면 어김없이 짐을 싸 30여차례나 중국을 찾은 끝에 나온 글들이다. 조조의 아방궁이라 불린 업도(都)를 찾았더니 허허벌판이더라는 이야기, 당 제국의 원류가 됐던 선비족들의 발원지 알선동을 찾아가는 길을 들려준다.

아버지와 의형제를 맺은 여백사 일가를 몰살하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던 조조 이야기를 통해 '철판 같이 두꺼운 얼굴과 뻔뻔스러움의 극치를 달리는 검은 마음(面厚心黑)'의 인물상이 영웅으로 행세했던 시절이 있었다며 검은 돈을 꿀꺽 하고도 시치미를 떼는 우리네 정치가들을 슬쩍 빗대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책이 귀중한 까닭은 혼란스러운 시기라 하여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던 위진남북조 시대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준 것이며 박교수의 '호한체제'란 가설을 통해 그 시대를 재해석해낸 데 있다.

'삼국지'의 인물 조조. 제갈량, 명필 왕희지, 시인 도연명 등의 이야기도 하지만, 통문성의 혁련발발 등 이민족 영웅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올해 8월 연구를 위해 하버드대 옌칭연구소로 떠난다는 박교수는 "중국 역사를 중화사상이 아닌, 이민족과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전공자뿐 아니라 일반독자도 읽기 쉽게 풀어 쓴 책"이라며 "다음 책에서는 '동양의 로마'로 통하는 장안을 다뤄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수십차례 다녀오면서 미국 방문은 처음인 그에게 또 다른 생각이 샘솟는다면 그가 지천명에 출간한 에세이 '오십자술'에 이은 '육십자술'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홍수현 기자 <shinna@joongang.co.kr>
사진=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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