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배지」그리며 고달픔을 이긴다"|서울 영신여객「버스」안내양 18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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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버스」안에서 책 읽는 학생이 제일 부러웠어요. 그때마다 「버스」창문에 매달려 문짝을 두드리는 자신의 처지가 서글퍼졌습니다. 그러나 이젠 외롭지 않아요. 우리도 대학생이 될 수 있으니까요.』
어둠이 채 걷히기도 전 첫탕을 시작으로 통금 전까지 서울시내를 다람쥐 돌 듯 하는 생활 속에 틈틈이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는 18명의 맹렬 안내양들이 있다.
서울 영신여객 시내「버스」학원반 안내양-. 전남해남에서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5년전 서울로 올라와 77년「버스」안내양으로 입사한 곽애숙양(21)은 지난해 8월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지금은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하루하루 새로운 지식이 내 몸에 축적된다 생각하니 일이 고된 줄 모르겠어요.』
우이동 골짜기에서 불어 내리는 칼날 같은 바람을 맞으며 「버스」창문을 닦는 곽양은 내년이면 가슴에서 반짝일 대학「배지」를 그리며 추위를 잊고 있다.
이 회사에서 곽양처럼 대학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안내양은 모두 18명. 3명은 대입준비를, 8명은 대입검정고시를, 나머지7명은 고입검정시험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있다.
안내양들을 위한 학원반을 만든 것은 사장 마병분씨(56). 교회집사인 마씨는 사춘기의 안내양들이 생활의 방향을 못잡고 방황하는 것이 안타까왔다. 그는 76년 우선 회사 안에 교회를 만들었다. 신앙만으로 젊은 안내양들을 바른 생활로 이끌기는 부족했다.
『나는 겨우 「버스」안내양 정도야』라는 자격지심에서 버는 돈을 몽땅 사치하는데 쓰는가 하면 위험한 탈선도 계속되었다. 마씨는 신앙과 더불어 교육이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 그해 진학희망자를 위한 학원반을 편성했다. 지금까지 학원반을 거친 안내양은 60여명. 그동안 대학생이 2명이나 나왔다. 지난해 세종대에 입학한 이남숙양(24)은 지금도 회사 도서관을 관리하고 있고 청주대 이옥영양(23)은 합격과 함께 대농방직에 취직, 청주에서 근무하고 있다.
77년 고향 경기도 포천에서 중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입사, 곧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했던 윤현숙양(18)은 2년째인 79년9월 홀어머니와 여동생 등 3식구의 가계를 꾸려가던 오빠 종훈씨(24)가 군에 입대했을 땐 어쩔 수 없이 공부를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지금은 청주에 간 옥영언니와 얼싸안고 한참을 같이 울었어요. 옥영언니의 권유로 학원반에 들어가 80년6월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8월에 합격했어요.』
윤양은 『신학대 등을 나와 전도사가 되고 싶지만 경제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해 방송통신대학을 가기로 했다』며 원서를 사들고 왔다.
『우리는 젊어요. 화끈하게 무엇을 하고 싶고 남들보다 뛰어나고도 싶어요. 몇 년씩 공부를 해도 뒷받침이 있는 젊은이들에 비하면 여전히 뒤지지만….』
대입검정반의 한효선양(18)은 경제적인 압박, 피로, 사춘기의 정신적 방황을 솔직이 털어놓으며 괴로울 땐 하나님께 기도로 위안을 받는다고 했다.
학원반 안내양들은 회사의 특별배려로 토·일요일만 근무를 하고 나머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원수업만을 받는다.
일당제로 하루 7천5백원씩 매달 8일 정도를 일하고 6만원을 받는다.
여기서 숙식비등을 빼고 나면 2만4천원 정도를 손에 쥔다. 학원비는 월2만원. 안내양들이 등록하고있는 수도학원(원장 이재식·47)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배움에 목말라하는 이들의 사정을 참작, 5천원을 할인해 주고 있다. 회사측은 학원성적이 20등 안에 드는 안내양은 등록비 전액을 대주고 있다.
『꼭 보고싶은 책도 한권 사 읽으려면 며칠 밤을 고민할 만큼 돈의 여유가 없습니다. 화장품 안사고 옷 안사입는 대신 보이지 않는 양식이 내 몸에 쌓인다는 기쁨으로 이겨내지요.』 곽양은 당장의 수입은 적어도 배움의 길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근무중 대입검정고시 합격소식을 들었다는 윤양은 많은 승객들이 있는 것도 잊은 채 『우리도 해냈다』며 소리를 질렀다. 학교 문턱도 못가본 정귀녀양(21)은 동료들한테 한글과 산술을 깨쳐 고입·대입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한 두권 쌓이는 교과서에서 저도 그만큼 자라는걸 느꼈어요』정양은 매일매일 새로운 세계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교육대를 나와 자기처럼 못배운 사람들을 가르치겠다는 한양이나 전도자가 되어 신앙을 사람들 가슴속에 심어주겠다는 윤양은 결코 좌절하지 않는 자에게 신은 행운을 주는 것 같다고 했다. <전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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